부활:1991년 이후

러시아정교회 역사

by 이헌철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Namu.Wiki

1991년8월19일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보수파 공산주의자들이 고르바초프를 연금했다. 탱크가 크렘린을 포위했다. 소련은 다시 한번 철의 장막을 내리려는 듯 보였다. 70년 동안 교회를 짓밟았던 체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닐로프 수도원에서였다. 1917년 혁명 이후 폐쇄되어 소년원으로 사용되던 이곳에서 1988년 러시아 정교회가 돌아왔다. 그리고 8월19일, 쿠데타가 일어난 그날, 수도원의 종이 울렸다. 쿠데타의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진 자유의 종소리였다. 사람들이 멈춰 섰다. 어떤 이는 울었다. 어떤 이는 십자성호를 그었다. 대부분은 그저 서서 들었다. 자신들이 평생 듣지 못했던, 부모도 듣지 못했던, 심지어 조부모도 잊어버렸던 그 소리를. 그것은 단순한 종소리가 아니었다. 부활의 나팔이었다.

3일 후, 쿠데타는 실패했다. 탱크는 물러갔다. 그리고 5개월 후인12월 25일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무신론 제국이 단 한 방의 총성도 없이 조용히 무너졌다. 크렘린 위의 붉은 깃발이 내려갔다. 그리고 러시아 삼색기가 올라갔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전국의 교회들이 문이을 열기 시작했다. 창고로, 박물관으로, 공장으로 쓰이던 교회들이 하나 둘씩 돌아오고 있었다. 70년 동안 침묵했던 종들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폐허에서 일어서다

1991년12월, 러시아 정교회가 마주한 현실은 참담했다.

1917년: 54,174개의 교회→ 1991년: 약6,800개만 운영 중

1917년: 1,025개의 수도원→ 1991년: 단22개만 남음

1917년: 112,629명의 사제→ 1991년: 약6,700명

신학교는 사실상 전멸

전국 곳곳에 흩어진 교회들의 상태는 더 비참했다.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은 1931년 스탈린이 폭파한 이후 야외 수영장이 되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 대성당은 무신론 박물관이었다. 키예프 페체르스카 라브라 수도원의 절반은 여전히 군사 시설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3세대가 무신론 교육을 받았다.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교회에 가본 적도, 기도를 해본 적도,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었다. 할머니의 은밀한 기도, 세례명을 가진 것 같기도 한 이름, 부활절에 먹는 쿨리치 빵, 그것이 전부였다. 정교회는 희미한 민속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1988년 러시아 정교회 천 주년 기념일 이후 이미 조짐은 보였다.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 아래 교회 문이 조금씩 열렸다. 하지만 1991년 이후는 달랐다. 물결이 아니라 쓰나미였다. 1992년 부활절, 전국의 교회마다 인파가 몰렸다. 교회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까지 늘어섰다. 70년 동안 금지되었던 부활절 자정 예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Христос воскресе!)”라는 외침이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많은 이들이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그런데 왜인지 눈물이 났다.

총대주교 알렉시 2세(재위1990-2008)는 이 부흥을 지휘했다. 그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소련 시대 내내 KGB의 감시 아래서 교회를 이끌어야 했던 복잡한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과거를 비판했다. ‘KGB 협력자’라는 의혹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다. 하지만 알렉시 2세가 해낸 일은 부인할 수 없었다.


1991-2000년 사이 19,000개 이상의 교회가 재개장 혹은 재건축

478개의 수도원 부활

5개의 신학교가 아카데미로 승격, 수십 개의 새 신학교 설립

사제 수 6,700명→ 27,000명으로 증가


1994년, 가장 극적인 순간이 왔다.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재건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이 폭파한 그 자리에, 똑같은 디자인으로, 러시아인들은 교회당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3억 달러가 넘는 비용이 들었다. 대부분 일반 시민들의 헌금이었다. 2000년 8월, 완공된 교회당이 봉헌되었다. 황금 돔이 다시 모스크바 하늘을 장식했다. 그것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부활의 상징이었다.

한 노파가 성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기자가 물었다. “왜 우십니까?”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1931년에 태어났습니다. 이 교회당이 폭파 되던 해에요. 평생 이 자리가 수영장이었어요. 이제 죽기 전에 이걸 보네요.”

image.png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Namu.Wiki

권력과의 위험한 포옹

교회의 부활에는 대가가 있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교회를 필요로 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러시아는 정체성의 위기에 빠졌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이 없었다. 옐친은 러시아 정교회가 그 공백을 메워주길 바랐다.

교회도 국가를 필요로 했다. 재건에는 돈이 필요했고, 법적 보호가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70년간 파괴된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려면 권력의 지원이 필요했다. 두 세력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악수는 포옹이 되었고, 포옹은 점점 더 꽉 조여졌다.

1997년 종교법이 전환점이었다. 이 법은 러시아 정교회를 ‘러시아 역사, 문화, 영성 형성에 특별한 역할을 한 종교’로 규정했다. 이 법의 정확한 명칭은 <양심의 자유와 종교 단체에 관한 법(On Freedom of Conscience and on Religious Associations)>이었다. 다른 종교들—이슬람, 불교, 유대교—은 ‘러시아 역사적 유산의 일부’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다른 기독교 교파들,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는 사실상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신규 종교 단체는 15년의 ‘등록 기간’ 없이는 법인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비자 발급이 제한되었다. 교회 건축 허가는 러시아 정교회에 우선권이 주어졌다.

알렉시 2세는 이를 “러시아는 천 년 동안 정교회 국가였다. 이제 그 전통을 회복하는 것뿐이다.”라고 옹호했다. 비판자들은 반박했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적 독점이다. 제정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우려는 점점 현실이 되어갔다.

푸틴 시대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이 되었다. 푸틴은 KGB 출신이었다. 소련 시대 그는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그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 이미지를 구축했다. 언론은 그가 정교회를 방문하고, 성수에 몸을 담그고, 촛불을 켜는 모습을 보도했다. 이것이 진심인가 정치적 계산인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푸틴에게 러시아 정교회는 세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 정통성이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푸틴은 새로운 러시아 정체성을 구축해야 했다. 그는 제정러시아의 영광과 소련의 위대함을 결합하려 했다. 그리고 그 사이의 다리가 정교회였다. ‘러시아는 천 년 정교회 국가’라는 내러티브가 핵심이었다.


둘째, 도덕적 권위다. 푸틴은 서구를 ‘도덕적으로 타락한 문명’으로 규정했다. 동성애, 세속주의, 개인주의들은 ‘전통적 가치’를 파괴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는 그 ‘전통적 가치’의 수호자로 제시되었다.


셋째, 지정학적 도구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에 수백만 신자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중앙아시아와 서유럽에도 있었다. 푸틴에게 이것은 소프트 파워였다.

2007년, 알렉시 2세는 해외 러시아 정교회와의 통합을 이루어냈다. 1920년대 망명한 이들이 세운 이 교회는 80년 넘게 모스크바와 단절되어 있었다. 통합은 치유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모스크바의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했다.

2009년, 알렉시 2세가 사망했다. 후임으로 키릴 총대주교가 선출되었다. 키릴(재위2009-현재)은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푸틴을 ‘하나님의 기적’이라 불렀다. “푸틴의 통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설교했다. 2012년 푸틴의 대통령 복귀를 “러시아 역사의 전환점”이라 축복했다. 대가도 있었다. 푸틴 정부는 교회에 엄청난 특혜를 주었다. 수천 개의 재산 반환, 종교 교육의 공교육 도입, 막대한 재정 지원, 군대와 경찰 내 성직자 배치 등이었다.

하지만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12년 푸시 라이엇(Pussy Riot) 사건이었다. 여성 펑크 밴드가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반푸틴 공연을 했다. 그들은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키릴 총대주교는 이를 ‘악마적 행위’라고 규탄했다. 서구는 분노했다. “종교재판이 돌아왔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 신자 대부분은 지지했다. “교회당은 거룩한 곳이다. 정치 퍼포먼스 장소가 아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더 이상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의 일부처럼 보였다.

우크라이나: 분열의 상처

그러나 진짜 시험은 우크라이나에서 왔다. 러시아 정교회의 시작은 키이우였다. 988년 블라디미르가 세례받은 곳이고, 페체르스카 라브라 수도원이 세워진 곳이다. 러시아 정교회 최초의 문화적, 영적 중심지가 키이우였다. 하지만 천 년이 지난 지금, 키이우는 더 이상 모스크바를 인정하지 않았다.

갈등은 오래되었다. 1990년대부터 우크라이나에는 세 개의 정교회가 공존했다.


1)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러시아 정교회에 속한 교회

2) 우크라이나 정교회(키이우 총대주교청) - 독립을 선언한 교회(1992)

3) 우크라이나 자치정교회- 더 급진적 독립파(1990)

2번과 3번은 세계 정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교회법적으로 승인 받지 못한’ 교회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상징이었다. 2014년, 크림 병합과 돈바스 전쟁이 터졌다. 정치적 갈등이 종교적 갈등으로 번졌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소속 우크라이나 교회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키릴 총대주교는 전쟁을 ‘형제간의 비극’이라 불렀지만, 러시아의 행동을 직접 비난하지는 않았다. 일부 우크라이나 사제들은 분노했다. “우리 땅이 침략당하는데 모스크바는 침묵한다!” 신자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동부 우크라이나의 일부 교회는 러시아군에 협력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교회가 습격 당했다.

2018년, 결정타가 왔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가 우크라이나에 독립 자치권(autocephaly)을 부여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OCU)가 탄생했다. 키릴 총대주교는 격노했다. “이것은 역사상 최악의 분열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천 년 동안 이어진 형제 관계가 깨졌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두 정교회가 대립했다. 새로 승인받은 OCU와 여전히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UOC의 교회 건물 소유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수백 건 발생했다. 일부는 폭력으로 번졌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 갈등을 돌이킬 수 없는 분열로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정교회 소속 교회들마저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했고, 전쟁은 천 년 역사의 정교회를 깊은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전쟁이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에 미친 충격, 그리고 키릴 총대주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후반부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십자가와 칼: 성찰과 질문

현재, 러시아 정교회는 역사상 가장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통계상으로는 부흥하고 있다.

38,000개 이상의 교회(1991년 대비 5배 증가)

1,000개 가까운 수도원

40,000명 이상의 사제

인구의7 0% 이상이 자신을 정교회 신자라고 응답

하지만 실제로는 정기적으로 예배 참석하는 비율은 약 7%정도이고, 성경을 읽어본 사람은 소수이며 고해성사를 하는 신자는 극 소수이다. 숫자는 늘었지만, 깊이는 얕다. 정교회는 문화적 정체성이 되었지만, 영적 체험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낯설다. 교회는 갈림길에 섰다. 국가 권력과의 동맹은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재산, 영향력, 사회적 위상을 주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도덕적 권위의 상실, 젊은 세대의 이탈, 그리고 무엇보다, 예언자적 목소리의 침묵이다.

안드레이 쿠라예프 신부는 공개적으로 전쟁을 비판했다. “어떻게 정교회 신자가 정교회 신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그는 교회 목양에서 해임되었다. 수백 명의 사제들이 비공개로 불편함을 표현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위험했다. 러시아에서 전쟁 비판은 범죄이기 때문이다.

2022년 침공 이후 키릴 총대주교가 2022년 9월 25일 모스크바 근교 노보-오가료보 교회에서 ‘전쟁터에서 의무를 다하다 죽는다면, 그것은 타인을 위한 희생이며, 이 희생은 그가 지은 모든 죄를 씻김 받는다.’라고 설교했다. 이것은 20세기 초 러시아 종교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는 경고한대로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진 교회가 다시 카이사르의 칼을 축복하는 비극적 회귀를 보여준 모습이었다.

옵티나 수도원의 장로들이라면 뭐라 했을까? 암브로시 장로는 “절망하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말했다: “권력에 가까이 가지 마라.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다.”고도 말했다.

솔로베츠키 수용소에서 죽어간 순교자들이라면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를 선택했을 것이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988년 블라디미르가 드니프로 강에서 세례받은 이후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러시아 정교회는 영광의 시대를 보았다. 키이우 루스의 황금 돔, 모스크바의 제3의 로마 선언, 19세기 영성의 꽃, 20세기 순교자들의 용기, 그리고 21세기 교회의 부활 기적을 보았다.

하지만 또한 굴욕의 시대도 보았다. 몽골의 지배, 표트르 대제의 억압, 소비에트의 박해, 그리고 오늘날 권력과의 위험한 동맹도 보았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칼이 베었을 때도, 불이 태웠을 때도, 감옥이 가두었을 때도, 정교회는 살아남았다. 때로는 제도로서, 때로는 비밀스러운 기도로서, 때로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전하는 찬양으로 살아 남았다.

오늘날 러시아 정교회는 다시 십자가 앞에 서 있다. 한쪽 팔은 국가 권력으로 향하고, 다른 팔은 순교자들의 유산으로 향한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역사가 답을 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부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교회 종소리는 계속 울릴 것이다. 누군가는 그 소리를 듣고 멈춰 설 것이다. 누군가는 십자성호를 그을 것이다. 누군가는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천 년의 신앙이 다음 천 년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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