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그리스도, 다른 언어

러시아 정교회 신학

by 이헌철
image.png 러시아 정교회 예배장면

1054년7월16일, 로마 교황의 사절 훔베르트 추기경이 아야 소피아 대성당 제단 위에 한 장의 문서를 내던졌다. 파문장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파문한다.” 며칠 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케룰라리우스도 맞받아쳤다. 교황의 사절들을 파문한 것이다.

그렇게 기독교는 둘로 갈라졌다.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무엇이 그들을 갈라놓았을까? 정치와 문화 차이도 있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신학이 있었다.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르게 이해한 것들. 삼위일체, 은총, 인간 본성에 대한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들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서방교회의 전통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많은 접촉이 없었던 정교회의 신학은 조금 낯선 부분이 있다. 이 장에서는 천 년의 분열을 만든 세 가지 핵심 질문을 살펴보려고 한다.

필리오케, 단어 하나가 교회를 나누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확정한 신경에서 성령에 대해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하시고...” 간단하고, 명료했다. 온 교회가 이렇게 고백했다.

그런데 6세기경 스페인에서 누군가 한 단어를 끼워 넣기 시작했다. “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 즉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시고..."라고 고쳤다. 809년, 샤를마뉴 대제가 이를 공식화했다. 11세기에 로마교회도 받아들였다. 동방교회는 격분 했다. “이단이다!” 단어 하나 안에 삼위일체를 바라보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 담겨 있었다.

정교회는 성부가 삼위일체의 유일한 원천이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태어나시고”,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하신다.” 만약 성령이 둘 다로부터 나온다면 원천이 둘이 되고, 성령이 성자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시다. 둘이 서로 사랑하시고, 그 사랑이 성령이시다. 따라서 둘로부터 하나의 원리로 발출하신다.

성경은 뭐라고 할까? 요한복음15:26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만 말한다. 하지만 요16:14-15에서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분처럼 성부에게 있는 것이 성자의 것이라고 한다.

결국 강조점의 차이다. ‘정교회는 성부의 원천성과 성령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서방교회(가톨릭과 개신교 전통)는 성자의 신성과 삼위의 일체성을 강조한다.’ 둘 다 성경에 근거한다. 천 년의 논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일까? 삼위일체는 인간의 두뇌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다. 성령이 어디로 부터 나왔느냐? 의 문제는 인간의 두뇌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고전13:12)라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은총과 자유의지

5세기 초, 영국인 수도사 펠라기우스가 로마에서 가르쳤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히포의 주교 어거스틴이 격노했다. 자신의 방탕한 과거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거스틴은 선언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우리 의지는 죄에 묶여 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이, 저항할 수 없는 그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천 년 후 루터와 칼뱅이 어거스틴의 길을 따랐다. 인간의 전적 타락,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저항할 수 없는 은총은 개신교의 핵심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동방교회는 다른 길을 걸었다. 물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 하지만 인간은 응답할 능력이 있다. 아담의 타락으로 손상되었지만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흐려졌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면 우리가 문을 열어야 한다. 은총과 자유의지는 함께 일한다. 신인협동(Synergy)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양쪽을 다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계3:20)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13)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로 얽혀 있다. 이것이 신비다.


원죄 :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가?

로마서5:12은 동서방 교회가 천 년 넘게 다르게 읽어온 구절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틴어 번역에서는 "그 안에서(in whom)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번역했고, 헬라어 직역에는 "왜냐하면(because)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로 번역했다.

서방 신학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이고 인간 본성은 완전히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교회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게 아니다. 대신 인간 본성이 손상되었다. 그 손상이 죽음이다. 원죄의 결과는 죄책이 아니라 죽음이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선택으로 죄를 짓는다는 입장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 후에도 남아 있고 흐려졌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선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알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것 같다. 문제는 ‘누가 옳은가?’가 아니다. ‘우리가 함께 진리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가?’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2)

지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안다. 정교회도, 가톨릭도, 개신교도 우리 모두는 퍼즐의 일부만 갖고 있다. 그렇다면 겸손히 서로의 통찰을 경청하자. 논쟁할 것이 있다면 논쟁하되 사랑 안에서 차이가 있다면 인정하되 서로를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완벽한 교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다. 정교회든,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우리 모두는 고백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서로의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거대한 신비를 비추는 서로 다른 거울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여기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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