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 신학
1341년,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궁전 안 대회의실에 동로마 제국의 지성들이 모여 있었다. 주교들, 수도사들, 철학자들이다. 그들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아토스 산의 수도사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였다. 그는 단순한 수도사가 아니었다. 황제의 자문이 될 뻔한 귀족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바를라암(Barlaam)이 서 있었다. 칼라브리아 출신의 천재 철학자였다. 그는 비웃듯 물었다.
“하나님은 본질상 완전히 초월해 계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팔라마스가 천천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에너지는 보입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본 그 빛처럼 보입니다.”
회의장이 술렁였다. 바를라암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둘로 나눈다는 말입니까? 본질과 에너지로? 이것은 이단입니다!”
팔라마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하지만 그 분은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가까이 계십니다. 손댈 수 없으시면서 동시에 만질 수 있으십니다. 알 수 없으시면서 동시에 알려지십니다. 역설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육신 자체가 역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문장이 울려 퍼지면서 그 말은 정교회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바를라암은 이해하지 못했다. 서방의 스콜라 철학에 젖은 그에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 간극은 절대적이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유한한데 이 둘 사이에 어떻게 다리가 놓인단 말인가? 하지만 팔라마스와 정교회 신학에서는 이미 이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는 여정의 이름은 테오시스(θέωσις, Theosis) - 神化, 곧 신이 되어 가는 것이었다. 서방교회는 이 말을 들으면 움찔한다. “신이 된다고? 이단 아닌가?” 하지만 정교회는 묻는다. “베드로후서1:4를 읽어보셨습니까?”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대담한 신학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
“Θεὸς ἐγένετο ἄνθρωπος, ἵνα ἡμεῖς θεοποιηθῶμεν.”
(Theos egeneto anthropos, hina hemeis theοpoiethomen.)
이 문장을 처음 읽는 개신교 신자는 당황할 수 있다. "신이 된다고? 과연 이것이 성경적일 수 있는가?" 그런데 이것은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한 말이다. 니케아 신조를 목숨 걸고 지킨 정통 중의 정통인 그는 자신의 저서 『성육신에 관하여』(De Incarnatione)에서 이렇게 썼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분이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신 것은,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실 개신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 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κοινωνοὶθείας φύσεως 벧후1:4)
그렇다면 정교회의 테오시스와 개신교의 성화는 같은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뿌리는 같으나 열매의 색깔이 다르다. 개신교의 성화는 주로 죄로부터의 점진적인 분리와 ‘도덕적 성숙’이라는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다면, 정교회의 테오시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공유할 수 없는 본질(Essence)과 공유 가능한 ‘에너지(Energies)’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존재 자체가 신성하게 변화하는 '신화(神化, Deification)'를 강조한다. 정교회는 인간이 결코 '하나님의 본질'이 될 수는 없지만,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에너지’에는 직접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개신교가 구원을 법정적 선언(칭의)에서 시작해 성품의 변화(성화)로 이해한다면, 정교회는 구원 자체를 하나님과 인간의 의지가 결합하는 신인 협력(Synergeia)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에 온전히 젖어 드는 과정으로 본다. 개신교 성화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강조하지만, 테오시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결단과 노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물론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테오시스와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테오시스는 그 연합의 결과로 인간의 본성 자체가 치유되고 신적 빛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점을 훨씬 더 대담하고 존재론적으로 선포한다. 결국 두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구원의 신비를 서로 다른 강조점과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본다. 정교회 교부들은 이것을 테오시스의 완벽한 이미지로 보았다. 떨기나무는 여전히 떨기나무다. 본질이 바뀌지 않지만 하나님의 불이 그것을 채운다. 그것을 통해 빛난다. 타오르지만 소멸되지 않는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고 피조물이다. 유한하다. 하지만 성령의 불이 우리를 채우므로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를 통해 빛난다. 우리는 타오르지만, 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불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망과 경계
테오시스는 위험한 가르침일 수 있다. 오해하면 교만으로 이어진다. “나는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나는 내 힘으로 완벽해질 수 있다”는 오만으로 변질될 수 있다. 역사는 이런 오해가 낳은 비극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정교회는 항상 겸손을 강조한다. 테오시스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 오신다. 우리가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드신다. 테오시스는 또한 순간이 아니라 평생의 여정이다. 수도사들이 수십 년을 기도 속에서 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단번에 주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날마다 깊어지는 관계로 보는 것이다. 로마서8:29-30을 다시 읽어보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목적은 단지 구원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분의 형상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다. 개신교든 정교회든, 우리는 모두 이 여정 위에 있다. 언어는 다를 수 있다. 강조점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향하는 곳은 같다.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이다.
구원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천국 입장권’쯤으로 생각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용서받고,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식이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구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구원은 단순히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평생의 여정이다.
일부 개신교 전통에서는 구원을 특정 순간의 결단으로 이해하는 자들도 있다. 이른바 ‘구원파’로 불리는 극단적인 집단들은 구원받은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교회 신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교회는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추는 춤에 비유한다. 물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우리가 자발적으로 응답하고 협력하기를 기다리신다. 이것을 정교회에서는 ‘시너지아’, 즉 ‘신인협력’이라고 부른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지만, 땅에서 싹이 나고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렇다고 농부가 아무것도 안 하면 추수할 수 없다. 구원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우리는 그 은혜에 응답하여 기도하고, 회개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구원을 이해하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 개신교는 구원을 주로 ‘법정’의 비유로 설명한다. 우리는 죄인으로 법정에 섰지만, 그리스도가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 전통에서는 ‘칭의(稱義)’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믿음의 순간 칭의가 일어나며,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확신 교리로 이어진다.
가톨릭은 법정과 병원의 중간쯤에 서 있다. 구원을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정교회와 유사하지만, 더 체계적이고 법적으로 설명한다. 세례를 통해 원죄가 씻기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으며, 선행을 통해 ‘공로’를 쌓는다는 개념이 있다. 연옥 교리를 통해 죽은 후에도 정화의 과정이 있다고 가르친다.
정교회는 ‘병원’과 변화‘의 비유를 선호한다. 우리는 죄로 병든 환자이고, 그리스도는 위대한 의사이다. 치유는 시간이 걸리고, 환자의 협력이 필요하며, 완전한 건강은 평생의 목표이다. 정교회는 칭의보다 ‘신화’를, 선언보다 ‘변화’를 강조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고 변화시키신다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여정
러시아 정교회의 구원론은 조급하지 않는다. 빨리, 쉽게, 확실하게 구원을 ‘획득’하려는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들은 구원을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한다. 정상은 멀리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나 회개하고, 다시 걸음을 시작한다. 완벽해지려고 애쓰기보다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이 여정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정교회는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계속 성장하고 변화한다고 믿는다.
결국 러시아 정교회의 구원론이 전하는 메시지는 ‘구원은 티켓이 아니라 변화이고, 선언이 아니라 여정이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원은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닮아가고, 하나 되어가는 사랑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