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 신학
451년 10월, 칼케돈의 성 유페미아 성당에 600명이 넘는 주교들이 모여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직접 소집한 공의회였다. 제국 전역에서, 아니 지중해 세계 전체에서 온 주교들은 모두 한 가지 질문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간단한 질문 같지만, 답은 간단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어떻게 굶주리고, 목마르고,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는가? 예수는 사람이신가? 그렇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가?
4세기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고 선언했다. 그분은 성부와 “같은 본질(호모우시오스)”이시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완전한 하나님이 어떻게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신성과 인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만나는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답했다. “그리스도 안에 신의 격과 인간의 격, 즉 두 격(hypostasis)이 구별되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간 예수 안에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도덕적 연합'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은 분노했다. "이단이다! 그리스도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리고 극단적인 키릴의 추종자 에우티케스가 선언했다.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하나의 본성만 있다. 신성이 인성을 완전히 흡수했다.”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동방교회는 분열 직전이었다. 어떤 이들은 네스토리우스를 따랐고, 어떤 이들은 에우티케스를 옹호했다. 거리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주교들이 서로를 구타했다. 신학 논쟁이 정치 투쟁이 되었고, 정치 투쟁이 폭력 사태로 번졌다.
이제 칼케돈에 모인 주교들은 결정해야 했다. 그들은 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어떤 이들은 소리를 질렀다. 어떤 이들은 탁자를 두드렸다. 며칠이 지났다. 마침내 한 장의 문서가 작성되었다.
칼케돈 공의회: 불가능한 균형
칼케돈 신조는 놀랍게도 긍정적 설명보다 부정적 설명이 더 많다.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말하기보다, 무엇이 아닌지를 더 많이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같은 분으로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두 본성이 섞이지 않고(ἀσυγχύτως, asygchytos), 변하지 않고(ἀτρέπτως, atreptos), 나뉘지 않고(ἀδιαιρέτως, adiairetos), 분리되지 않게(ἀχωρίστως, achoristos) 결합되어 있다.”
네 개의 부정어. 이것이 칼케돈 공의회의 천재성이었다. 섞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이것은 에우티케스의 단성론(Monophysitism)을 거부한다. 신성이 인성을 흡수하지 않는다. 두 본성은 각각 온전히 보존된다.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게 보존되고 있다. 이것은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Nestorianism)을 거부한다. 그리스도는 두 인격이 아니고,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이 있다. 이것은 신비였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요점이었다. 칼케돈 공의회는 성육신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경계선을 그었다. “이 안에 머물러라. 이쪽으로 가면 신성이 사라진다. 저쪽으로 가면 인성이 사라진다. 중간에 서라.” 왜 이것이 중요한가? 신자들은 종종 묻는다. “이 복잡한 신학 논쟁이 왜 중요한가? 예수를 믿고 따르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예수를 믿는가? 만약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유한한 존재의 죽음이 무한한 죄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분은 우리를 대표할 수 없다. 사람이 범한 죄는 사람이 갚아야 한다.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듯이, “하나님이 되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온전한 인성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온전한 인성은 구원받을 수 없다. 칼케돈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 이 둘이 하나 안에 섞이지도 분리되지도 않고 이 균형을 지켰다.
단성론 논쟁: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칼케돈 공의회가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새로운 분열을 낳았다. 이집트의 콥트교회, 시리아의 야곱파교회, 아르메니아교회, 에티오피아교회 이들은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했다. 그들은 “칼케돈 이전 정교회(Oriental Orthodox)”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별도로 남아 있다. 왜 그들은 칼케돈을 거부했을까? 부분적으로는 정치적 이유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콘스탄티노플의 지배에 불만이 있었다. 칼케돈 공의회는 황제가 소집했고, 황제의 신학을 반영했다. 동방 교회들은 이것을 제국주의로 봤다.
1990년대에 콥트교회와 동방정교회는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그리스도론을 고백한다. 차이는 주로 언어적이었다.” 하지만 1500년간의 분열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왜 단성론(Monophysitism)은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 그것은 단순함 때문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끝.” 간단하고, 명료하고, 위엄 있다. 칼케돈의 ’두 본성‘은 복잡하다. 어떻게 하나가 둘일 수 있는가?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섞이지 않으면서 분리되지 않을 수 있는가? 모순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교회는 답한다. ’그것이 바로 신비다.‘ 성육신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배할 수 있을 뿐이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블라디미르 로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신비(mystery)는 이성의 한계가 아니라 이성의 목표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배하기 위해서 신학을 한다.”
이콘 논쟁의 신학적 배경: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다
726년, 비잔틴 황제 레오3세가 놀라운 칙령을 발표했다. “그리스도의 이콘(성상)을 금지한다.” 제국 전역에서 군인들이 교회에 들어가 벽화를 긁어냈다. 이콘을 불태웠다. 이콘을 소유한 자들을 체포했다. 성상파괴운동(Iconoclasm)이 시작되었다.
왜 그랬을까? 레오3세는 여러 이유를 댔다. 이콘 숭배는 우상숭배라고 했다. 십계명이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이슬람과 유대교도 성상을 금지하는데, 기독교만 우상을 숭배한다고 비난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신학적이었다. 황제와 그를 지지하는 주교들은 물었다. “어떻게 하나님을 그릴 수 있는가?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그림으로 제한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그리고 더 날카로운 질문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이콘을 그릴 때, 무엇을 그리는가? 신성을 그리는가? 그렇다면 신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인성을 그리는가? 그렇다면 신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둘 다 그리는가? 그렇다면 신성과 인성을 섞는 것이다.”
이것은 칼케돈 논쟁의 연장이었다. 성육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749)은 시리아 수도원에서 답을 썼다. 그는 비잔틴 제국 밖에 있었기에 황제의 박해를 받지 않았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고 강력했다.
’옛날에는 하나님을 그릴 수 없었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이 육체를 취하셨다. 그분이 보이게 되셨고, 만질 수 있게 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을 그릴 수 있다. 이콘은 성육신의 증거다. 그리스도의 이콘을 그릴 때, 우리는 신성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취하신 인성을 그리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를 그릴 수 없다면, 그분은 진정한 사람이 아니다. 만약 그분을 볼 수 없다면, 성육신은 환상이다. 하지만 그 분은 진짜 사람이셨다. 제자들이 보았고, 만졌고, 함께 식사했다. 이제 우리도 그 분을 이콘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칼케돈 신학의 적용이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이시다. 그분의 인성은 진짜다. 그리고 진짜 인성은 물질적이다. 물질적인 것은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 정교회의 논리이다.
성상파괴 운동은 60년간 지속되었다. 수천 명의 수도사가 순교했다. 무수한 이콘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787년, 여황제 이리니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350명의 주교가 모였다. 그들은 선언했다. “이콘은 허용될 뿐 아니라 필요하다.”
하지만 공의회는 분명히 구분했다. 라트리아(latreia,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프로스키네시스(proskynesis, 공경)은 이콘에게 한다. 우리는 이콘을 숭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콘을 공경한다. 이콘은 우리를 원형(prototype)으로 인도하는 창문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이콘은 물질을 통한 기도다.”
이콘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영지주의는 말한다. “물질은 악하다. 영혼만 구원받는다.” 이원론은 말한다. “영적인 것은 좋고, 물질적인 것은 나쁘다.” 하지만 정교회는 대답하기를 “아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취하셨다. 성육신에서 그리스도는 진짜 육체를 입으셨다. 그 육체는 지금도 부활하여 하늘에 계신다. 물질은 구원받을 수 있다. 아니, 물질은 이미 구원받았다.”
이콘은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나무와 안료, 금과 색깔 이 모든 물질이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다. 왜? 하나님이 물질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개신교인들은 종종 이콘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의심한다. “이것은 우상숭배 아닌가?” 하지만 정교회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충분한 이해의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