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 신학
1411년 여름 모스크바 근처 작은 수도원에 예순 살 수도사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나무 판자 앞에 앉아 있었다. 수도원장이 부탁했다. “삼위일체를 그려주십시오.” 루블료프는 고민했다. 어떻게 그려야 할까? 다른 화가들은 창세기 18장을 그렸다. 아브라함이 나무 아래서 세 명의 손님을 접대하는 장면이다. 늙은 부부가 음식을 준비하고, 종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송아지가 잡히는 복잡한 그림이었다.
루블료프는 다르게 보기로 했다. 그는 모든 것을 지웠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나무도, 집도 다 지웠다. 오직 세 천사만 남겼다. 세 천사가 둥근 탁자에 앉아 있었다. 왼쪽 천사는 파란 옷을 입었고, 가운데 천사는 붉은 옷을, 오른쪽 천사는 초록 옷을 입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 천사가 가운데 천사를 바라보고, 가운데 천사가 오른쪽 천사를 바라보고, 오른쪽 천사가 다시 왼쪽 천사를 바라보았다. 끝없는 원의 모습이다. 그들의 옷자락이 만드는 선도 부드러운 원을 그렸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탁자 한가운데, 세 천사 사이에 빈자리가 있었다. 루블료프가 붓을 놓았을 때, 그는 이 그림이 삼위일체의 비밀을 말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외롭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상상한다. 높은 옥좌에 혼자 앉아계시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명령을 내리시는 분으로 우리가 없어도 전혀 문제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루블료프의 그림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은 혼자가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세 분이 함께 계신다. 그것도 그냥 함께가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사랑하며 함께 계신다.
4세기 신학자들은 이것을 발견했다. 정교회에서 성부는 누구신가? “성자를 낳으신 분”이다. 성자는 누구신가? “성부에게서 나신 분”이다. 성령은 누구신가?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세 분은 서로를 통해서만 정의된다. 성부는 성자 없이 성부가 아니다. 성자는 성부 없이 성자가 아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관계 속에 있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하셨어야 한다. 우주를 창조하기 전에는 피조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서 영원히 사랑을 나누셨다.
루블료프의 그림 속 세 천사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외로운 왕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분이지만 본질은 하나이시다.
춤추는 사랑
정교회는 삼위일체를 춤에 비유했다. 세 명의 무용수를 상상해보라.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움직인다. 한 사람이 손을 내밀면 다른 사람이 받아주고, 한 사람이 돌면 다른 사람도 함께 돈다. 완벽한 조화이고, 완벽한 하나 됨이다. 그런데 누가 리더인가? 셋 다 리더이다 춤 속에서는 구분이 사라진다. 모든 움직임이 서로에 대한 응답이다. 이것이 삼위일체다. 세 위격은 영광과 존귀에 있어 본질적으로 평등하시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그 사랑을 받아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은 그 사랑의 흐름이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요17:21) 안에 계신다고 한다.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신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사랑이 그렇게 만든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를 보라. 한 사람의 기쁨이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된다. 한 사람의 슬픔이 다른 사람의 슬픔이 된다. 그들은 여전히 두 사람이지만, 사랑으로 하나다. 하나님 안에서는 그 사랑이 완전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는 어떤 벽도, 어떤 거리도 없다. 완전한 투명함. 완전한 나눔이고, 완전한 하나됨으로 하나님은 사랑의 춤을 추신다.
우리를 위한 자리
루블료프의 그림으로 다시 돌아가자. 세 천사가 원탁에 앉아 있다. 그런데 탁자 한가운데, 그들 사이에 빈자리가 있다. 그 자리는 누구 것일까? 예수님의 기도가 계속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요17:21). 하나님은 우리를 구경꾼으로 남겨 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그 춤 속으로 초대하신다. 그 사랑의 공동체 속으로 초대하신다.
19세기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이것을 깊이 이해했다.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관계의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나는 혼자서는 온전 한 내가 아니다. 나는 너와 함께하는 나다.
러시아 정교회 가정에서는 동쪽 벽에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이콘을 건다. 아침 저녁으로 그 앞에서 기도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결단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서로를 사랑하시듯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루블료프의 이콘 앞에 선다.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에서, 세계 곳곳의 교회에서, 수많은 가정의 벽에서 그들은 세 천사를 본다. 서로를 바라보는 부드러운 시선과 춤처럼 흐르는 옷자락, 그리고 가운데 있는 빈자리를 본다. 어떤 이들은 그냥 지나간다. “예쁜 그림이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멈춰 선다. 그들은 깨닫는다. “저 빈자리가... 나를 위한 것이구나.”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더 이상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은 춤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춤, 사랑의 춤, 삼위일체의 춤, 이것이 러시아 정교회가 천 년 넘게 지켜온 신비다. 복잡한 교리가 아니라 초대다. “와서, 우리와 함께 춤추라. 와서, 사랑하며 살라. 와서, 하나가 되라.” 당신은 이미 초대받았다. 자리는 준비되어 있다. 춤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