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정교회 역사
988년 여름, 키이우의 드니프로 강변에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비잔틴 제국에서 온 사제들이 그들의 머리에 성수를 뿌렸다. 페룬, 다즈보그, 스트리보그—슬라브의 천둥신과 태양신, 바람의 신들의 목조 신상들은 그날 아침 일찍 강물에 던져졌다. 수백 명의 첩을 두고 형제를 죽여 왕위에 오른 잔혹한 이교도 군주 블라디미르는 바실리우스라는 세례명을 받으며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개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유럽의 운명을 결정짓 고, 오늘날까지도 피로 얼룩진 갈등의 씨앗을 심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잔혹한 이교도에서 기독교 군주로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야기는 신앙의 순수함보다는 정치의 냉혹함에 더 가깝다. 러시아의 연대기 작가들은 낭만적인 전설을 기록했다. 블라디미르가 세계 주요 종교들을 비교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고, 그의 사신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목격한 장엄한 예배에 압도되어 돌아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라고 그들은 보고했다고 한다. 이슬람교는 술을 금지했기에 거부되었다. "술은 루스인들의 기쁨"이라는 블라디미르의 말이 천 년 넘게 회자되어 온 이유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더 복잡하고 현실적이다. 987년,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내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두 명의 반란군 장군이 제국을 위협했고, 황제는 야만족 군주 블라디미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블라디미르는 6,000명의 전사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그 대가로 황제의 누이 안나와 결혼하며, 비잔틴 제국의 친족이 되는 것이었다. 조건은 단 하나,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었다. 988년, 그는 세례를 받았다. 그가 진정으로 신을 믿었는지, 아니면 제국의 위세와 권력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권력이 곧 신의 뜻이었던 시대였으니까.
강물에 던져진 신들, 새로운 신앙의 탄생
키이우로 돌아온 블라디미르는 즉시 변화를 명령했다. 그가 한때 세운 이교 신전들은 파괴되었다. 천둥의 신 페룬의 거대한 목조상은 끌려 내려와 강물에 던져졌다. 오래된 신은 그렇게 강물을 따라 떠내려 갔다. 그리고 블라디미르는 키이우의 모든 주민들에게 드니프로 강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은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잔틴의 사제들이 그리스어로 기도문을 읊었고, 통역자들이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집단 세례였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진정으로 믿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키이우 루스 전역으로 기독교는 퍼져나갔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교도 봉기는 한 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옛 신들을 잊지 않았고, 새로운 신 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독교와 이교 신앙이 뒤섞인 “이중신앙”이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에게 기도하고, 집에서는 여전히 집의 정령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기독교의 도입은 키이우 루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989년부터 블라디미르는 첫 석조 교회인 <십일조 교회> 건설을 시작했다. 그 이름은 그가 국가 세입의 10분의1을 교회에 헌납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붙여졌다. 비잔틴의 건축가들이 도착했고, 그들은 동로마 제국의 영광을 키이우에 재현했다. 황금 돔을 가진 교회들이 하나씩 지평선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비잔틴 학자들과 수도승들이 키이우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키릴 문자를 가져왔고, 그리스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학교가 세워졌고, 수도원의 필사실에서는 복음서와 성인전이 필사되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블라디미르 자신도 변했다고 전해진다. 여러 명의 아내를 내보냈고, 사형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약탈과 정복에 몰두하던 군주가 자선과 평화를 말하는 기독교 왕이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천 년의 그림자
블라디미르가 드니프로 강에서 세례를 받은 그날, 그는 단지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결정지었고, 천 년이 넘도록 이어질 갈등의 씨앗을 심었다. 988년 키이우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비잔틴 제국의 정신적 자식이었고, 그 유산은 너무나 강력해서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살아남았다.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를 함락되자, 모스크바는 스스로를 “제3의 로마”라는 정교회의 새로운 수도로 선언했다.
그러나 키이우는 모스크바보다 먼저 세례를 받았다. 블라디미르가 드니프로 강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정치적 실체나 도시로서의 모스크바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블라디미르의 진정한 후계자인가?
오늘날 이 질문의 답을 총성과 미사일이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의 종교 전쟁: 한 집에 두 개의 교회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한 가지를 알아야 한다. 2022년 전쟁이 시작되기 전, 우크라이나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정교회가 있었다. 마치 한 집에 사이가 나쁜 형제가 둘 있는 것과 같았다.
첫 번째는 ‘모스크바파’ 교회였다. 공식 명칭은 우크라이나 정교회(UOC)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교단으로 약 12,000개의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모스크바가 정교회의 중심이었고, 우크라이나 교회는 그 산하 조직처럼 기능했다. 이들에게 모스크바는 어머니 교회였다.
두 번째는 '독립파' 교회였다. 2019년 새로 탄생한 우크라이나 정교회(OCU)로,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의 총대주교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것은 러시아가 크림을 점령한 후 일어난 일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정교회에서 ‘명예상의 첫째’ 지위를 갖는 곳이다. 우크라이나 정교회(OCU)이는 “우리는 더 이상 러시아의 종교적 식민지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기도문을 읽지만, 이 두 교회는 서로를 적대시 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들에게 종교는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체성의 문제였다. “나는 누구인가? 우크라이나인인가, 아니면 러시아 세계의 일부인가?”
전쟁과 함께 시작된 분열
988년 드니프로 강에서 블라디미르 대공이 세례를 받았을 때, 그는 천 년 후의 전쟁을 예견했을까?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종교 갈등은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다. 누가 988년의 유산을 소유하는가? 누가 블라디미르의 정통 후계자인가? 러시아는 키이우가 자신들 문명의 요람이라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자신들의 역사를 도둑질한다고 반박한다. 둘 다 같은 성인을 섬기고, 같은 기원을 주장하지만,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이 분열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크렘린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까? 전 세계 정교회의 균열은 어떻게 봉합될 수 있을까? 988년 드니프로 강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1세의 동상이 현재 키이우(드니프로 강변)와 모스크바(크렘린 궁 바로 옆) 양쪽에 모두 거대하게 서 있다. 그 잉크는 아직 마르지 않았고, 너무나 자주 피의 색깔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