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문학의 나라,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를 걷다 보면 '고리끼 공원'이라는 이름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러시아에서 고리끼는 단순한 문학가를 넘어 20세기 러시아 역사 그 자체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의 일반 독자들에게 막심 고리끼(Максим Горький, 1868-1936)는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체호프는 익숙해도 고리끼는 그저 ‘사회주의 작가’ 정도로만 기억될 뿐이다. 하지만 고리끼의 문학과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울림을 주는 보편적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막심 고리끼'라는 필명의 비밀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이다. 그가 '막심 고리끼'라는 필명을 선택한 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 러시아어로 '고리끼(Горький)'는 ‘쓰라림, 고통’을 뜻한다. ‘막심(Максим)’은 ‘최대의’라는 의미다. 즉, 그의 필명은 “최대의 고통”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고리끼를 가리켜 “구세계와 신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표현했다. 무너져가는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생애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 정확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
고리끼의 어린 시절은 그의 필명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볼가강 연안의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콜레라로 아버지를 잃고, 열한 살에는 어머니마저 열병으로 떠나보냈다. 고아가 된 소년은 외조부모 손에서 자랐지만,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열두 살부터 가출과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고, 자살 소동까지 일으켰다. 5년간 러시아 전역을 떠돌며 제빵공, 청소부, 접시닦이, 선원 등 온갖 하층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밑바닥 삶의 경험은 훗날 고리끼 문학의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되었다. 그는 자전적 소설 3부작 『유년시대』(1913), 『세상 속으로』(1916), 『나의 대학들』(1923)에서 이 시절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교육했다. 신문 기자로 일하며 습작을 통해 필력을 다졌고, 1895년 『체르카시』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톨스토이가 인정한 젊은 작가
고리끼의 재능을 일찍 알아본 사람은 당대 러시아 문학의 두 거장, 톨스토이와 체호프였다. 안톤 체호프는 고리끼를 적극 후원했고, 고리끼가 러시아 아카데미에서 정치적 이유로 제명당하자 “그렇다면 나도 나간다”며 스스로 아카데미를 탈퇴할 정도였다. 톨스토이는 “고리키는 80세 노인으로 태어났다.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알게 된 것을 그는 태어나자마자 알고 있었다”고 평했다.
실제로 1900년에 찍힌 톨스토이와 고리끼의 사진을 보면, 두 사람 사이의 깊은 교감을 느낄 수 있다. 고귀한 귀족 출신의 대문호와 밑바닥에서 올라온 젊은 작가로서 이들은 계급과 세대를 넘어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공유했다. 고리끼는 훗날 『톨스토이와 거닌 날들』(1919)이라는 회고록을 남겨 이 관계를 기록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탄생과 『어머니』
고리끼의 문학적 위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라는 점이다. 그의 대표작 『어머니』(1907)는 이 새로운 문학 사조를 정의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공장 노동자들의 활동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억압과 무지에 찌들어 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 여인이 사회주의자인 아들을 통해 각성해 나가는 이야기다.
소설 속 어머니 펠라게야 닐로브나는 술주정뱅이 남편의 폭력 속에서 살아왔다. 남편이 죽자 아들 파벨마저 아버지를 닮아 술을 마시며 방황한다. 그러나 파벨이 혁명 활동에 뛰어들면서 술을 끊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어머니도 조금씩 변화한다. 처음엔 귓가를 맴돌기만 하던 아들 동지들의 대화를 어머니는 점차 이해하게 된다. 스스로 글자를 익히고, 공장으로 전단을 반입하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자, 법정에서 아들 연설을 옮겨 쓴 전단을 군중에게 뿌린다. 경찰이 목을 조르며 제지하자 외친다. “불운한 사람들이여.”
이 소설이 특별한 것은 단순한 정치 선전물을 넘어서는 문학성 때문이다. 고리끼는 어머니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어머니는 한 번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했으나 지금은 자신이 많은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았고, 그것은 새로운 기쁨으로 다가와 어머니가 고개를 높이 들고 다니게 해 주었다.” 두려움과 용기, 무지와 각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생생하다.
한국의 '어머니'들과 고리끼
흥미롭게도 고리끼의 『어머니』는 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일제강점기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 고리끼의 서적은 ‘빨갱이 작가’라는 낙인 때문에 금서였다. 그럼에도 운동권 학생들은 영어판을 몰래 들여와 해적판을 만들어 돌려 읽었다. 1985년 석탑출판사에서 처음 정식 출판되었을 때, 표지 판화는 민중미술가 홍성담이 제작했다.
왜 『어머니』는 한국 운동권의 필독서가 되었을까? 그 답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에게서 찾을 수 있다.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아들이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라고 유언을 남기자, 이소선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노동운동에 바쳤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평범한 어머니가 청계피복노조를 지키고, 수배받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독재정권과 맞섰다.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고리끼 소설 속 닐로브나와 이소선, 한 명은 제정 러시아의 허구적 인물이고, 한 명은 1980년대 한국의 실존 인물이다. 그러나 두 '어머니'의 이야기는 놀랍도록 닮아있다. 모성애가 개인적 감정을 넘어 사회적 연대로 확장되는 과정, 두려움 속에서도 정의를 위해 나아가는 용기,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헌신, 이것이 바로 고리끼 문학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울림을 주는 이유다.
문학이 건네는 보편적 가치
고리끼의 말년은 복잡했다. 1917년 혁명 직후 볼셰비키 정권의 폭력성을 비판하므로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1931년 스탈린의 요청으로 귀국했지만, 1936년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스탈린의 대숙청 과정에서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진실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한 것은 스탈린과 몰로토프였다.
정치적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고리끼가 러시아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분명하다. 19세기 황금기 러시아 문학(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과 20세기 소비에트 문학을 잇는 가교였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밑바닥 출신이었지만, 독학으로 대문호 반열에 올랐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소설가로서의 역량은 훌륭하지만 기초교양이 부족해 표현력이 제한 받는다”고 평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리끼 문학의 독특함이었다. 투박하지만 진실하고, 거칠지만 강렬한 그의 문체는 밑바닥 삶의 생생함을 담아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다섯 번이나 지명되었지만 끝내 수상하지 못한 작가이다. 모스크바 곳곳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정작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리끼의 문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불의한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가?
고리끼라는 이름, 즉 ‘최대의 고통’은 단지 한 작가의 필명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밑바닥 사람들이 겪어온 삶의 무게이자, 동시에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서려는 인간 정신의 불굴함을 상징한다. 2026년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도, 고리끼의 문학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 고통과 마주하고 있으며, 그 고통을 어떻게 딛고 일어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