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대에서 수도원까지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구원의 역사

러시아 정교회 문화: 신앙이 예술이 되다

by 이헌철
image.png 바실리 페로프(1834~1882년)가 1872년에 그린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트레챱코프 미술관

1849년12월22일 새벽, 영하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형장에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 섰다. 총구가 그를 향했다. 죄목은 단순했다. 비평가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한 죄였다. 러시아 정교회의 위선과 농노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차르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 교황을 비판하는 것은 곧 사형이었다. 사형 집행관이 총을 겨누고 발사 명령을 내리기 직전 극적으로 사형이 취소됐다. 그것은 황제 사면의 특사였으나 잔혹한 심리 고문이었다. 이는 죽음의 공포를 통해 반역의 싹을 자르려는 황제의 잔혹한 연극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벌은 4년간 시베리아 옴스크에서의 중노동과 이어진 5년간의 강제 군복무였다. 총10년에 가까운 시베리아 유배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청년에게 주어진 유일한 책은 성경이었다. 성경은 유배지로 가는 길, 토볼스크 역에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의 부인들이 건네준 성경이었다. 이들은 짐승 취급을 받던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러시아의 젊은 귀족 장교들의 부인들이었다. 무장봉기의 실패로 남편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는데 함께 따라가던 부인들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성경을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으며 그는 유배지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사형대에서 받은 ‘두 번째 생명’은 이후 그의 모든 문학을 관통하는 질문이 됐다.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image.png 데카브리스트 반란 @/brunch.co.kr/write?magazineNo=314280

이성의 살인, 양심의 붕괴

유배에서 돌아온 도스토옙스키가 1866년 발표한 『죄와 벌』은 충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법학도다. 그는 기묘한 이론을 만든다. 인류는 법을 따라야 하는 ‘범인’과 법을 만들 수 있는 ‘비범인’으로 나뉘며, 비범인은 더 큰 선을 위해 작은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논리였다. 나폴레옹처럼 위대해지려면 쓸모없는 고리대금업자 노파 하나쯤은 죽여도 된다고 믿었다. 그는 실제로 도끼로 노파를 죽인다. 이성적으로 완벽한 범죄였다. 그러나 살인 직후부터 라스콜니코프는 무너진다. 열병에 시달리고, 악몽에 떨며, 자신도 모르게 범행 장소로 되돌아간다. 머리로는 정당화되지만 가슴이 거부한다. 자신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을 죽인 살인자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 나타난 것이 창녀 소냐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파는 스무 살 소녀였다. 도스토옙스키는 놀라운 역설을 보여준다. 사회 최하층의 창녀가 지식인 살인자를 구원하는 것이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요한복음의 나사로 이야기를 읽어준다. 죽었던 나사로가 예수에 의해 부활하는 이야기. “지금 즉시 네거리에 서서 대지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추세요. 그 다음 모든 사람에게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말하세요. 라스콜니코프에게 필요했던 것은 법정의 판결이 아니라 인간성의 회복이었다. 결국 그는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난다. 그곳에서 비로소 사랑을 통한 구원을 경험한다.

슬픔이 이끈 순례

1878년 여름. 도스토옙스키는 세 살난 아들 알렉세이를 잃었다. 간질을 앓던 작은 생명이 발작 중에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 “내 죄 때문입니다. 내가 아이에게 병을 물려줬습니다.” 밤마다 자책의 말을 되풀이하는 그의 눈빛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철학자 솔로비요프가 슬픔에 잠긴 친구를 옵티나 수도원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암브로시 장로를 만났다. 백발의 노인은 작가의 거칠고 떨리는 손을 자신의 마른 손으로 감싸 쥐었다. 침묵이 위로가 되고, 고요가 언어가 되는 시간이었다. 장로는 천천히 말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많은 이에게 위안을 주실 것입니다.” 그 만남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태어났다. 조시마 장로라는 인물이 도스토예프스키의 펜 끝에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리한 관찰자의 눈으로 그는 수도원 안의 어둠도 보았다. 출세를 꿈꾸는 라키친, 광신으로 치장된 페라폰트 신부. 수도원은 천상의 빛이 스며들었지만 인간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진 소우주였다.


조시마와 페라폰트- 사랑과 증오의 두 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 수도원에는 두 종류의 수도사가 있다. 조시마는 세상을 끌어안는다.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의 방에는 찾아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병든 여인, 죄를 고백하는 농부, 방황하는 청년들, 조시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심판하지 않고, 그저 함께 운다.

반대편에는 페라폰트가 있다. 그는 육체를 학대한다. 단식하고, 침묵하고, 딱딱한 돌바닥에서 잔다. 극단적 금욕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서 나온다. 페라폰트는 귀신을 본다고 한다. 벽 틈새에서, 천장 구석에서. 그러나 그가 보는 귀신은 사실 그 자신의 내면, 사랑으로 승화되지 못한 분노와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조시마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에서 악취가 난다. 수도사들은 동요한다. 성자라면 시신이 썩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페라폰트는 외친다. “보라! 하나님이 심판하셨다! 이것이 거짓 성자의 증거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말한다. 진정한 성스러움은 기적이나 육체의 불멸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능력,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말한다.

대심문관- 가장 위험한 질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이반이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대심문관’ 이야기다.

16세기 이단 화형이 한창인 시기에 그리스도가 재림한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아이를 살린다. 그러나 90세의 종교재판소 대심문관이 그를 체포한다. 어두운 밤에 감옥에서 대심문관은 침묵하는 그리스도에게 독백을 쏟아낸다.

"당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간을 그 고통스러운 자유로부터 해방시켰다. 우리는 기적과 신비와 권위로 인간을 지배한다. 그들은 이제 우리에게 복종하며 평화롭게 산다. 당신은 방해물일 뿐이다.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 일하지만 당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심오한 통찰이다. 종교 제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반할 수 있다는 것, 교회가 자유와 사랑 대신 권력과 지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다만 노인에게 조용히 다가가 그의 창백한 입술에 입맞춤할 뿐이다. 대심문관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어준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수도원 안의 세속적 야심

수도원은 세속을 떠난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속의 욕망이 종교적 언어로 재포장되는 곳이었다. 라키친을 보라. 가난한 수도사이지만 내면은 야심으로 들끓는다. 그는 사회주의를 말하고 평등을 외친다. 그러나 그의 진짜 관심사는 돈과 명성이다.

톨스토이의 『신부 세르기』는 더 복잡한 인물을 보여준다. 세르기는 진심으로 성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성자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순례자들이 그를 찾아올 때 은밀한 만족을 느낀다. 어느 날 여인이 내기로 성자를 유혹하러 온다. 세르기는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다. 극적인 자기 희생을 한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묻는다. 그것도 일종의 허영이 아닌가?

결국 세르기는 무너진다. 수도원을 떠나 거지가 된다. 떠돌다가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준 늙은 유모를 만난다. 그녀는 궁핍 속에서 살지만 불평하지 않고 그저 성실하게 매일을 살아간다. 세르기는 깨닫는다. 진정한 성스러움은 화려한 수도원의 장로가 아니라 가난한 시골 노파의 이름 없는 섬김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양파 한 뿌리의 비유

도스토예프스키는 ‘양파 한 뿌리’ 우화를 들려준다. 이 우화는 러시아의 민담에서 빌려온 것이다. 소설에서 그루셰니카가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평생 악행만 저지른 할머니가 죽어 지옥에 떨어진다. 수호천사가 “이 할머니가 단 한 번 양파 한 뿌리를 거지에게 준 적이 있다”며 양파를 드리운다. 할머니가 양파를 잡고 올라오는데 다른 죄인들도 매달린다. 그러자 할머니가 소리친다. “이건 내 양파야!” 그 순간 양파가 끊어지고 할머니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진다.

구원의 가능성은 작은 선행에서 시작하지만, 타인을 배제하는 순간 구원은 사라진다. “증오는 증오하는 사람을 증오스럽게 만든다. 지옥은 더 이상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다.”

두 문호가 발견한 진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서로 만난 적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정교를 믿는 보수주의자였고, 톨스토이는 제도 종교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적 기독교를 꿈꿨다.

그러나 수도원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수도원을 이상화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도원 안의 위선, 권력욕, 명예욕, 교만을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진정한 영성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시마 장로와 늙은 유모는 다른 모습이지만 같은 진리를 체현한다. 성스러움은 지위도, 명성도, 기적도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성실함이다. 이름 없는 섬김이다.

수도원은 천국이 아니다. 거기에도 인간의 모든 약함이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바로 그 타락 가능성과 매일 씨름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영성이 태어날 수 있다. 완벽한 성자는 환상이다. 그러나 불완전하지만 끊임없이 사랑하려 애쓰는 인간, 넘어지고 일어서며 다시 손을 내미는 인간,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오늘날 도스토예프스키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효율과 성과로 사람을 재단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라스콜니코프처럼 타인을 ‘쓸모’로 평가하지 않는가? SNS에서 증오를 쏟아내지 않는가. 수도원 안의 라키친처럼 영성의 언어로 포장된 세속적 야심을 추구하지 않는가? 페라폰트처럼 엄격한 원칙으로 타인을 심판하지 않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답한다. 구원은 더 완벽한 이론에 있지 않다. 더 강한 힘에 있지도 않다. 구원은 대지에 입 맞추고, 양파 한 뿌리를 나누며, 고통 받는 이와 함께 우는 사랑에 있다.

임종 직전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 유배 시절 받았던 그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숨을 거뒀다. 사형대에서 받은 두 번째 생명으로 그가 남긴 것은 단순하지만 영원한 진리였다. 인간은 죄를 짓고, 고통 받고, 사랑으로 구원받는다. 불완전하지만 끊임없이 사랑하려 애쓴다. 넘어지고 일어서며 다시 손을 내민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인 이유다.


image.png 시베리아 마을의 겨울 풍경, 출처 : 우먼센스 www.womansens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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