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몰랐죠, 나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이 확 뒤집어질 만한 사건을 겪게 된다. TV 뉴스에 나올 만한 어마어마한 사건은 아닐지라도 인생의 경로가 바뀌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나 같은 경우에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내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도전했다가 2차에서 떨어졌다. 그때 2차 경쟁률이 2:1이었다. 나는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다. 면접장에서 심사위원의 질문을 받기 전까지. “우리 학교 이름이 뭐예요?” 나는 당당히, “한국예술종합학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심사위원이 하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왜 자기소개서에는 한국종합예술학교라고 썼어요? 성격이 원래 그렇게 덜렁 거리나?” 그때 이후 어떻게 면접을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질문을 했던 심사위원의 파란 셔츠만 기억에 또렷하다. 어쨌든 그 이후 나는 수능을 봐서 대학에 들어갔고, 문예창작을 전공하면서 복수전공으로 영화를 했다. 그리고 부전공으로는 민속학을 했고. 그러니까 나는 어마어마한 욕심으로 대학 4년을 보낸 셈이다. 그런데 정작 10년 넘게 뮤지컬 창작을 해왔다. 이유는 어처구니가 없는데, 돈 때문이었다. 그때 학교에서는 뮤지컬 창작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공모를 했다. 상금이 무려 300만 원!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돈에 욕심이 났고, 한 번도 뮤지컬을 본 적이 없었음에도 무작정 써 재겼는데, 덜컥 수상을 했다. 그런데 그때 심사위원이었던 분이 뮤지컬 창작인들을 양성하는 기관에 계셨고, 그분의 권유로 뮤지컬 창작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 와 중에 입단하게 되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영화 용어 보다 무대 용어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인생의 경로가 뒤바뀌었다. 하지만 예술을 창작하는 일이기에 애초에 내 꿈과 크게 벗어난 일은 아니었다. 장르가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으니까. 하지만 그건 일종의 자조. 나는 가끔 계속 영화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영상원에 다시 도전을 했으면 어땠을까, 뮤지컬 작업을 멈추고 영화판에 뛰어 들어봤으면 어땠을까… 그때마다 나는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일보다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그건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내 선택이 아닌 일로 인생의 경로가 바뀌었다면? 하늘을 원망하거나, 체념하거나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럴 때 우린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혹은 ‘팔자’ 라거나.
무당이 된 자들은 소위 ‘신병’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치게 된다. 신병은 무당마다 제각각 다르게 오는데, 크게 두 가지의 경우로 찾아온다. 무당이 될 제자에게 풍파가 오거나, 제자가 될 주변 사람들에게 풍파가 오거나. 이때의 풍파는 글자 그대로 아주 거대하다. 병명을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거나, 하고 있는 일이 쫄딱 망하는 거다. 그래서 ‘무당길’ 말고는 생각도 할 수 없게끔 말이다. 하지만 절대로 제자를 죽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무당길을 가야 하니까. 죽고 싶어도 못 죽게 한다.
언젠가 한 무당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냥 신령이 꿈이든 현실이든 나타나 친절하게 알려주면 안 되느냐고. 그랬더니 무당이 픽 웃으면서 그렇게 꿈으로 나와서 일러 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아주 드물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의심의 동물이기 때문에 신령의 말씀을 무시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렇기에 신령은 보여주는 것이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힘을. 그 힘은 예비 제자가 가장 아끼는 것을 차례로 부수는 것으로 보여준다. 예비 제자가 제 몸을 가장 아끼면 몸을 치고, 재산을 붙잡고 있으면 그것을 없애고, 자식을 소중히 여기면 아프게 하는 식으로. 그래서 엎드려 이 길을 가겠다고 울부짖을 때까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잠시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몇 년 전, 신을 받은 지 한 달 정도 되었다는 무당을 만나게 된 일이 있었다. 모 대학에서 한국사 교양을 맡고 있는 김교수를 통해서다. 당시 나는 사극 뮤지컬을 쓰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검수받을 일이 있어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당시 김교수에게 무당 관련 글을 쓰고 싶은데, 자료조사차 무당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넌지시 운을 띄웠는데, 기억하고 있었는지 연락이 왔다. 예전 연구기관에서 알게 된 사람의 지인이 최근에 신내림 굿을 받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겠냐고. 김교수는 나에게 그 지인의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그 지인을 편의상 손 선생이라고 칭하겠다. 손 선생은 민속학 관련 연구를 하고 있었다. 최근에 신내림 굿을 받은 사람은 같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박사과정에 있다가 무당이 되었다고 했다. 그 무당은 성수동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 무당을 편의상 성수동 무당이라고 하겠다. 친절한 손 선생은 직접 성수동 무당과 만날 약속을 잡아 주었고, 약속 당일 날 같이 가주기까지 했다. 나는 레드 와인 한 병을 준비했다. 역 앞에서 처음 손 선생을 만났다. 손 선생은 성수동 무당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성수동 무당의 외 증조할머니가 명성황후 밑에서 일했던 대단한 무당이었다고.
“뭐라고요? 그럼 진령군의 후손이란 말이에요?”
“아니, 그 밑에서 일했던 무당들 중 하나. 하지만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그분 돌아가시고, 딸이 무당 되고. 지금 성수동 무당 어머니는 건너뛰고, 이제 손녀가 무당이 된 거지. 몸주신이 그 외 증조할머니예요.”
무당은 하늘과 땅에 깃든 모든 신령을 받아낼 수 있다. 하지만 신내림을 할 때, 그 모두를 받는 것은 아니다. 무당일을 하면서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무당일을 오래 한 사람을 많은 신을 받아냈다 하여 ‘만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받아낸 모든 신령이 몸주신이 될 수는 없다.
몸주신은 신내림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내려오는 신령으로 무당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함께 해 준다. 특히 몸주신이 조상일 때 점을 잘 보게 된다. 이때의 조상은 귀신이 아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혼이 뜨게 되는데, 그 혼이 자신의 과업을 모두 벗고 도를 닦으면 신령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신령이 되었다고 무턱대고 아무 인간에게나 들이댈 수는 없다. 인간의 몸은 유리와 같아서 신령의 기운이 들어가면 산산이 부서지고야 만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실체를 본 세멜레의 몸이 광휘에 휩싸여 파괴된 것처럼. 그래서 신령은 특별한 기운을 가진 인간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무당이다. 특히 조상 중에 신령이 나왔다면 가장 먼저 자기 자손을 둘러보게 된다. 신령을 받아낼 그릇이 있나 없나. 성수동 무당은 이런 메커니즘에 의해서 진령군 밑에서 일을 했다던 일제 강점기의 무당 조상을 몸주신으로 받게 된 것이다.
성수동 무당집은 낡은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간판도, 깃발도 달지 않은 상태다. 좁은 계단을 올라 벨을 누르니 얼굴이 뽀얀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세요.”
성수동 무당은 미소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집안에는 태어난 지 갓 백일이 지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우는 아이를 성수동 무당의 엄마가 어르고 있었다. 성수동 무당은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면서 나를 신당으로 안내했다. 나는 준비해 간 와인을 내밀었다. 그녀는 설핏 웃으면서 “이건 할아버지 앞에.” 하더니 와인을 신단 위에 놓고 인사를 했다. 나도 덩달아 따라 했다.
성수동 무당의 신당은 조촐했다. 신단위에 촛대가 놓여 있고, 향을 피울 수 있게만 해 놨다. 다른 기물은 전혀 없었다. 다만 벽에 내려받은 신령을 세로로 적어 놓은 종이가 주욱 붙어 있었다.
“이런 신당은 처음 봐요.”
내 말에 성수동 무당은 “깔끔하죠? 서울형 무당이라 그래요.”라고 말했다. 우린 점을 볼 것도 아니라서 거실로 나갔다. 아기는 그 사이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고 우리는 다소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성수동 무당의 어머니가 과일을 가지고 나왔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뭐예요?”
성수동 무당의 질문에 나는 준비해 갔던 두툼한 종이 뭉치를 건넸다.
“최근에 작업한 건데… 검토 가능할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급한 거예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 대략 어떤 내용이 담긴 글인지를 설명했다.
“재밌겠네요. 그런데…”
땡그랗 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만 “아니에요.”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하… 도대체 뭐가 아니라는 건지.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이런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는 상대가 좋아할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방법이지. 나는 “아기가 딸이에요?” 하고 물었다. 이 방법이 통한 건지, 성수동 무당은 표정이 스르르 풀리더니 한동안 아기 이야기를 했다. 잠을 통 안 자서 돌아버리겠는데, 또 똘망한 얼굴을 보면 예뻐서 미치겠고… 성수동 무당은 어느새 수다스러운 사람으로 돌변해 있었다. 목소리가 차분하면서도 나긋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무척이나 반가운 것 같았다. 우리는 한 동안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준비해 간 질문을 주고받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성수동 무당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내가 무당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요. 외 할머니도 무당이었고, 외 할머니의 어머니도 무당이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를 건너뛰었으니, 나는 괜찮겠지… 그랬죠. 외 할머니는 엄마한테 신가물 기운이 없다고 했어요. 그래도 엄마 팔자가 세긴 했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도 무당이 되고. 엄마는 외 할머니 일을 도와주면서 처녀 시절을 보냈다고 했어요. 예전에는 집에서 굿을 했으니까, 굿 한 번 할 때 준비할 게 많거든요. 손님들도 집에서 밥 먹고 가고 그랬으니까. 잠깐 경리일도 하긴 했는데, 할머니가 워낙 바빠서 그만두고 할머니 손님 중 한 분이 중매를 서서 아빠를 만났대요. 그런데 아빠는 나 일곱 살 땐가 돌아가셨고. 그 후로는 할머니랑 같이 살았어요.
엄마는 할머니가 내가 무당이 될 거라고 한 번도 말 안 했대요. 만약 무당이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자랐으면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무당일도 할 만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어요. 일이 밀려들면 돈을 확 버니까. 기도 좀 하고 그만큼 돈 벌면…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을 철없을 때 했다는 거예요. 지금은 내가 멍청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고등학교 때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엄마 분식집 차리고 나 대학 가고…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 없었어요. 그런데 뭔가 운명이라는 게 있나? 중학교 때부터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도 그쪽으로 갔거든요. 그때 답사 같은 데 가면 간혹 무당을 만나요. 그럴 때마다 나를 보면 갸웃갸웃할 때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보다 했죠. 졸업하고, 대학원 가고, 거기서 남편 만나고, 결혼 이야기 오고 가고 그러는데… 그때부터 이상한 꿈을 꾸는 거예요.
누워 있으면 거기가 순식간에 무덤 자리로 변해요. 왜, 관 넣으려고 땅 파 놓은 거. 그리고 흙이 막 덮여요. 근데 그 꿈을 꾸고 나면 꼭 사달이 나는 거예요. 친척 누구가 죽는 다는지, 망했다던지… 그러다가 결혼날짜 잡아 놓고 그날 자는데 꿈을 꾼 거예요. 이번에도 무덤 자리에 누워 있는데, 이번에는 맨 흙바닥이 아니라 관에 들어가 있었어요. 딱 알겠더라고요, 관 속이라는 걸. 관 속에 누워서 흙 뭉텅이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여기 이러고 있다 가는 그대로 죽을 것 같더라고요. 꿈 속이지만요. 관을 두드리고 발버둥을 치니, 어느 순간 관뚜껑이 팍 하고 열리는데… 흙이 쏟아졌어요. 흙냄새가 훅 느껴지면서 꿈에서 깼는데, 그때부터 내가 이상한 거예요. 밥도 못 먹고, 못 자고… 결혼 준비는 스톱되고, 엄마가 느끼는 바가 있어서 아는 무당집에 나를 데려갔는데, 나를 보자마자 딱 그러는 거예요. 신령이 어깨까지 내려왔다고.
엄마는 벌벌 떨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서 체념이 빨랐어요. 그런데 나는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어요. 이렇게 무당을 하게 할 거면 대학은 왜 가게 했으며 대학원에 조교에 박사 과정까지 하게 만들어 놨는지. 도대체 왜 나를 여기서 미끄러트리나… 그리고 결혼은… 내일모레 결혼식인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미칠 노릇이었죠. 남편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요. 나한테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남편은 상관없다고 결혼을 하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시댁은요? 그분들은 무당 며느리가 반가우실까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라고 하고서는 헤어졌는데, 난 결혼이 파투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남편이 강경하게 나오니까 시부모님들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셨나 봐요. 결혼 문제는 어이없게도 잘 풀렸는데, 오히려 내가 답답했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내림굿 하려면 날짜 잡고 삼산 돌고 해야 하는데… 계속 이게 맞나 싶었어요. 어쨌든 결혼식을 먼저 하고 내림굿을 하기로 했죠. 그런데 그 사이에 애가 덜컥 생긴 거예요. 아이 가진 몸으로 내림굿을 어떻게 해요… 도저히 못하겠다 했더니 신어머니께서 신령님들과 날짜 합의를 보시겠다고 했어요. 일 년. 일 년 후에 내림굿을 받기로 하고, 나는 몸과 마음을 추슬렀어요. 뱃속에 아이가 있기도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최대한 안 하려고 노력했고요. 그 일 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이뤄 놓은 것들을 내려놓는 시간으로 보냈어요. 참… 허무했어요. 내림굿 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지금도 답답은 해요. 하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이 했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으니까… 이제 제자길만 충실히 가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달래는 거예요.
성수동 무당과는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무당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신령님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기도는 어떻게 하는지… 아직 간판을 달지 않은 이유는 신령님께서 별호를 내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사람들이 제법 찾아온다고 무당인 본인이 신기해했다. 그리고 내 글뭉치를 받고 얼버무렸던 말이 뭐였는지도 말해줬다. 그건 지금 당장은 뭔가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언니는 잘 될 거라는 말이었다고. 확신이 없어서 말을 돌렸다고. 그때는 ‘당장’이라는 말에 꽂혀서 속이 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분이 좋다. 언젠가 잘 될 거라는 말은 불확실하지만 또한 가장 확실한 말이기도 하니까.
성수동 무당은 얼마 안 가 별호를 받고, 간판을 걸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둘째도 태어났다. 그녀에겐 아쉬운 건 많아도 확실한 행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