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퇴원을 했다. 3주간 별거를 했던 엄마와 아버지는 재회했고 각자 다른 공간에서 우울해 보였던 두 분은 서로를 만나 얼굴빛이 환해졌다. 퇴원 후 바로 구례로 가시겠다고 했지만 안 된다고 했다. 다음 진료 날까지 4일은 계시라고 붙잡았다. 아버지는 고집을 부렸지만 내가 놓아주지 않았다.
"아버지 엄마 손도 다쳐서 밥 하기도 힘들고 안 돼요. 당분단 여기 계세요"
"내가 다 할 줄 안당께. 니는 내가 애긴 줄 아냐? 니는 보믄 나를 애기 취급해"
"아버지 그게 아니잖아요. 며칠 있다가 다시 병원 가야 하니까 그때까지는 계세요"
아버지는 고집을 꺾었다. 그런데 다음 진료에서 엄마는 손이 붓고 염증 소견이 있어 다시 입원을 했다. 엄마도 아버지도 한숨을 푹 쉬었다. 병원 의사는 돌팔이가 되어있었다.
"의사들은 입원시켜야 돈이 된께. 입원시킬라고 그런 거여"
"손이 부었잖아요. 그냥 두면 나중에 더 큰 일나요. 일단 입원하고 좀 지켜보게요"
"아따 참말로. 그럴 거였으면 퇴원을 시키지를 말았어야제"
"원래 의사가 좀 더 있으라고 했는데 엄마 아버지가 퇴원시켜 달라고 계속 그러니까 통원치료 하라고 한 거잖아요"
엄마는 다시 입원했고 부기가 빠지고 염증수치가 내려가자 3일 만에 다시 퇴원했다. 물론 의사는 더 있어보라고 했지만 엄마의 고집이 이겼다.
주말에는 엄마 퇴원기념으로 가족 외출을 하기로 했다. 추억도 돋울 겸 어릴 적 엄마 아버지와 함께 봤던 서커스가 생각나 표를 예매했다. 엄마는 연신 신기하고 재밌다 하셨고, 아버지도 만족하셨다. 돌아오는 길, 여수 바다를 눈요기하고 중화요리 맛집에서 저녁 식사도 했다. 평소 소식하던 아버지가 평소보다 많이, 맛있게 드셨다. 뿌듯했다.
마무리로 노래방까지. 아버지는 발로 박자를 맞추며 ‘고향역’을 구수하게 불렀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뿐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행복하고 감사한 하루였다. '늘 오늘만 같았으면'하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소화도 안 되고 몸살기운이 있다고 했다.
병원에 가보자고 하니 뭐 이런 걸 가지고 병원에 가냐고 하셨다. 약 먹으면 괜찮다고 했다.
구례로 가던 날도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아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자기 몸은 자기가 더 잘 안다며 거부했다. 오랜 객지 생활에 이제 엄마도 퇴원을 했으니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가득했을 거다.
나는 두 분을 구례 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안부전화에서 두 분은 항상 괜찮다고 했다. 엄마의 병원 정기 검진이 있어 일주일 만에 집에 들렀을 때 아버지는 기운이 조금 없어 보였지만 이야기도 잘하시고 식사도 잘하셨다.
“아부지 몸은 괜찮으셔요?”
“늙으먼 다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 글제 괜찮애“
아버지 얼굴에 상처가 있었다. 여수에 있을 때도 면도하다가 얼굴을 베어서 세균에 감염되면 위험하니 상처 안 나게 조심하라고 잔소리했었다.
"아버지 얼굴에 또 상처 났네. 면도칼로 면도하지 마시라니까요"
"전기면도기로 했는디 면도기가 오래돼서 근당께"
면도기를 주문해서 택배로 보내 드린다고 했다. 면도하다 상처 나면 감염위험이 있어 위험하니 새 면도기가 배송 올 때까지 면도하지 마시라고 했다. 아버지는 면도기 값이라며 자기 지갑에서 십만 원을 꺼내어 거부하는 나에게 기어이 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