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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솬빠 Oct 08. 2024

아버지의 장례식. 아버지는 새신랑 같았다.

119 대원이 도착했고 제세동기로 심장박동을 확인했다. 모니터의 일직선 그래프가 아버지의 사망을 다시 한번 알려주었다. 형에게 전화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뜬금없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형도 당황했다. 형은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했고 나는 장례식장을 정하고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

   

119 대원 도착 후 형사들이 왔다. 집에서 사망하는 경우 형사들이 현장 확인을 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살펴보더니 얼굴에 상처가 왜 난 것이냐고 물어서 면도하다가 베었다고 답했다. 사진을 찍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난 후 아버지가 사망했음을 한번 더 확인시켜 주려는 듯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버지의 얼굴을 이불로 덮었다. 사망 경위와 시간, 지병 등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수첩에 메모했다. 형사의 눈빛은 무언가를 캐내려는 사람 같았다.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묻고 나의 주민번호와 전화번호, 사는 곳까지 받아 적었다. 그러더니 특이사항이 없으니 잘 처리될 것 같다고 했다. 마치 어떤 혐의를 받다가 벗어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의사의 사망 진단도 받아야 한다고 장례식장 직원이 알려주었다. 진단서는 어떻게 발급받는지, 몇 부가 필요한지, 비용은 얼마인지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장례식장 직원을 도와 아버지를 장례식장 차에 모셔드리고 짐을 챙겨 엄마와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장례식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과 비슷했다. 장소를 정하고, 상조도우미는 몇 명으로 할지, 음식은 무엇으로 할지, 장의차량은 무엇으로 할지. 상복은 몇 벌이나 필요한 지, 관은 어떤 나무로 할지, 등등 장례식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선택해야 했다. 어떤 걸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나에게 장례식장 직원은 웨딩플래너처럼 내가 선택해해야 할 것들을 알아서 척척 추천해 주었다. 부고 메시지마저도 양식이 다 되어있어서 정신없는 나에게 신경 쓸 것을 줄여주었다.

결혼식이 함께 하는 '시작'에 대한 공식적 알림이라면 장례식은 함께 할 수 없음. '종료'에 대한 공식적 알림이었다.


필요한 과정을 마치고 상복을 갈아입은 후 엄마와 둘이 빈소에 앉아 모니터에  아버지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실감 나지 않았다. 꿈이길 바랐지만 현실이었다.

나를 제외한 형제자들은 모두 경기도에 있어서 내려오려면 몇 시간은 걸릴 참이었다.


소식을 듣고 온 고모가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했을 아버지의 누님은 “우리 동생 아까워서 어쩌끄나~ 벌써 가서 아까워서 어쩌끄나~ 왜 그렇게 갑자기 가냐?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뭐가 급해서 그렇게 가브렀냐” 하면서 한참을 울부짖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벌컥 실감 났다. 나는 아버지를 잃었고 엄마는 남편을 잃었고 고모는 한 명 남은 동생을 잃었다. 고모의 곡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순간은 나도, 엄마도 고모보다는 덜 슬퍼 보였다.

     

형과 누나 가족들이 도착하자 단단히 붙잡고 있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한바탕 눈물을 쏟아 내고 손님을 맞았다.


많은 사람들 속, 아버지 친구분들의 모습은 유독 마음이 아렸다. 영정 사진 속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빛에 서로의 시간이 담겨있었다. 잘 참아내고 있던 눈물이 그런 눈빛을 마주할 때면 버텨내지 못하고 와락 쏟아졌다. 그분들 역시 아버지처럼 걷는 것이 불편했고 지팡이에 의지했다. 말없이 아버지의 사진을 보다가 깊은숨을 내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고 자리로 가서 앉으셨다.


"약주 한 잔 드릴까요?"

"약 때문에 술 못 묵어. 엊그저께도 연락했는디 갑자기 이런 일이 있당가?"

술도 음식도 괜찮다고 하시며, 한참을 앉아있다 영정사진 속 아버지를 한번 더 쳐다보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생전에 아버지는 지인들의 장례식을 다녀오면 곧 자신의 순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듯 우울해 보이곤 했다. 친구분들의 모습이 아버지의 그때 모습과 닮아있었다.


3일을 그곳에서 지내자 낯설었던 장례식장이 익숙하게 까지 느껴졌다. 손님으로 갔던 장례식장과 상주로 있는 장례식장의 차이는 컸다. 그동안 장례식장에서 손님을 맞던 상주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느껴졌다.

찾아와 주고 연락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고 많은 위로가 되었다.


발인 때 본 아버지의 얼굴은 돌아가신 날 보았던 그때의 표정 그대로였다. 엄마가 미리 사두었다는 수의는 하늘색과 하얀색으로 조화를 이룬 화사한 느낌이었다. 거기에 새하얀 신발까지 아버지는 마치 새신랑 같았다. 우리의 슬픈 마음과 다르게 곱고 예쁘게 차려입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도 잡고, 얼굴도 만지고,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으며 목 놓아 울었다. 내가 구례 집에서 느꼈던 아버지의 온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장례지도사가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떠나는 아버지에게 한 명 한 명 인사할 시간을 주었다. 우리는 각자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12월 5일. 겨울이지만 햇볕이 쨍쨍하고 날씨도 좋았다. 화장장에서 아버지의 키 만했던 관은 사라지고 두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상자 안에 담겨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에게서 다시 온기가 느껴졌다. 장손품에 안겨 고향집으로 돌아와 평생을 살았던 집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생전에 자신이 마련해 둔 곳에 자리했다.



벌초하러 오려면 자식들 고생한다고 조상님들 묘도 모두 이장해서 가족 묘를 만들어두었던 아버지다. 바로 앞에 밭이 있어서 아버지는 밭에서 일하는 엄마를 지켜볼 수 있을 거다. 앞이 탁 트여 있어서 가만히 경치만 보고 있어도 심심하지 않은 곳이다.

그곳에는 엄마와 우리 형제들의 자리까지 다 준비되어 있다. 우리는 결국 훗날 거기서 다 만나게 되겠지.


'아버지. 아버지가 지켜보는 재미가 있도록 행복하게 즐겁게 오래오래 살다가 갈게요.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 아버지 만나서 잘 지내고 계세요'

 

이 세상에서 아버지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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