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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솬빠 Oct 11. 2024

아빠.. 시계를 잃어버렸어요.

30여 년 전 시계방의 추억.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내 마음속 아버지가 달라졌다.

어릴 적 어색하고 불편했던 아버지의 기억들은 스르르 녹아내렸다.

내가 아버지에게 입혀둔 무뚝뚝했던 겉옷은 벗겨지고 따뜻한 정이 몽굴몽굴 피어났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였다. 누군가 선물해 준 돌핀 전자시계를 잃어버렸다. 태권도장에서 운동 중 벗어둔 것을 깜빡하고 그냥 놓고 왔다. 집에 와서 알아채고 다시 가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혼날까 두려워 며칠을 숨기다 엄마에게 고백하자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직접' 말하라고 했다.

   

그 말을 꺼내기 위한 과정과 시간, 긴장감, 두려움. 초등학생이었던 당시의 나에게는 버거운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말해야  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은  사정없이 쿵쾅됐다.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긴장과 무서움을 감추지 못한 채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털어놓았다.


"아빠.. 시계 잃어버렸어요"


혼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화내거나 큰소리치지 않고 물건 관리를 잘하라고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려 쳐다본 아버지의 입가에는 묘하게 미소가 느껴졌다. 어린 나는 ‘왜 아버지가 웃는 거 같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 웃음 어린 표정, 미소의 의미를 20여 년이 넘게 지나 알게 되었다. 나의 아이들이 어떤 잘못을 해서 긴장한 모습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할 때면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아마도 그때의 아버지도 어린 아들이 귀여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며칠 후 나에게 갈 때가 있으니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하라고 했다. 어디를 가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버스 승강장멈춰 섰다. '어디를 가는 거지?'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버스가 오자 아버지는 올라탔고 나는 따라서 탔다. 아버지가 2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에 앉았지만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나는 옆에 앉지 않고 아버지의 뒷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는 나를 옆자리로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버스에서의 매너를 지키려는 듯 조용하고 또 조용했다. 나는 가만히 아버지의 널따란 등을 감상하다가 그가 일어서자 나도 일어났고, 그가 내리자 나도 따라 내렸다. 나는 아버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하고 다시 앞장다.



아버지는 시계방으로 들어다. 한걸음 뒤에 따라 들어가 문 앞에서 아버지와 시계방 사장님을 응시했다.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더니 와서 맘에 드는 걸로 고르라고 했다. 시계를 잃어버려서 화났을 거라 생각한 나의 마음과 다르게 아버지는 아끼던 시계를 잃어버린 아들의 속상함을 달래주고 싶었나 보다. 시골 촌놈은 쇼핑 경험도 많지 않아 물건을 고르는 과정이 상당히 쑥스러웠다. 똑같은 돌핀 시계를 사지는 않았다. 나는 갈색 줄에 금색 초침시계를 골랐다. 초등학생과 어울리지는 않은 디자인인데 왜 그 시계를 골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시계는 약이 떨어지고 멈췄지만 그날 아버지와의 기억은 멈추지 않고 계속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 기억은 죽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

시계방에 가던 날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따뜻하고 기분 좋은 장면으로 선명하게 남았다.


아버지는 어버리지 말고 잘 쓰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쫄래쫄래 따라오는 날 보며 아버지는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을까? 손을 잡고 같이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나만큼이나 어색해서 생각만 하다 말았을까? 그때 내가 앞으로 쪼르륵 다가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면 우리의 모습은 조금 달라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색한 아버지였지만 그와 손을 잡고 싶었던 나는 아이들과 어딘가를 갈 때면 손을 잡으려 노력한다.


앞서 걸어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선하다. 비틀비틀 불안하게 걷지 않고 힘 있게 걷던 등빨 좋은 아버지의 뒷모습. 체크무늬 갈색 점퍼. 그때는 그 점퍼가 나이 들어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옷을 입은 50대의 아버지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나중에 죽으면 딱 한 번만이라도 이 세상에 다시 와서 가족들 지내는 모습을 보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지 꼭! 오세요. 아버지가 알려주신 데로 부끄럽지 않게 바른 사람으로 잘 살고 있을 테니 부디 꼭 찾아와 주세요. 이왕이면 시계방에 갔던 그날처럼 건강하게 걷던 아버지로 오세요.’


내 기억 속 많은 곳에 아버지가 자리하고 있다. 어릴 적 '어색하고 불편했' 아버지에 대한 색안경이 따스한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이제는 마주할 수 없는 아버지를 매일매일 기억 속에서 꺼내어 본다. 아버지의 모습을 오해해서 죄송하다고 마음을 전할 순 없지만 그의 과거 속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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