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서 떠났지만 아버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마주할 수 없지만 아버지와의 기억을 꺼내어 오늘도 그를 만난다.
아버지가 지나 보낸 나이를 한 살 한 살 나도 거치면서 이전에는 공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다. 내 나이가 80이 넘어 나의 몸을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게 되면 지금보다 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겠지.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인 마흔두 살에 아버지의 몸에 간직하던 나를 엄마에게 건네주었고 엄마는 서른여섯에 막내인 나를 낳으셨다.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이 친구들 부모님에 비해 나이가 많아서 불만이었다. '왜 이리 늦은 나이에 날 낳으셨지?'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마흔둘이 되어보니 그때의 아버지는 '청춘이셨겠구나.'싶다. 나를 가질 만큼 엄마와도 원만한 관계였으니 감사한 일이다. 더군다나 늦둥이였던 내 삶에 40년 이상을 함께 해주었으니 그것은 더 더 감사한 일이다.
감사한 아버지에게 미안한 이야기를 꺼내본다.
내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다. 봄이나 가을이면 마을 어른들은 버스를 대절해서 관광을 다녀왔다. 그날은 마을의 남자들만 관광을 다녀왔고,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엄마와 나는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음악이 '뽕짝뽕짝' 울려 퍼지는 버스에서 만취한 남자들이 비틀비틀 줄줄이 내렸다.
"아따 뭔 술을 그렇게 마셨다요!"
"정신 좀 차리랑께 참말로"
"00 아버지 오늘 겁나게 취해브렀네."
마을사람들은 회관 앞 공터에 마중 나와 있다가 자신의 남편 또는 자신의 아빠를 각자의 방식으로 맞이했다.
아버지는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아빠 집~에 갈까~ 더 놀~다 갈~까?"하고 혀가 꼬부랑하게 물었다. "집에 오지 마!"라고 답했다.아버지는 나의 대답에 잠시 멈칫했지만 혼내지는 않았다.내 대답과는 다르게 함께 집으로 왔다. 기분 좋게 취해 반겨주는 아들의 말을 들고 싶어 물어본 것이었을 텐데 나는 아버지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말해 버렸다.그 순간 우리 사이 마음의 거리를 느꼈을까?
어른이 되어서도 그 순간은 잊히지 않고 마음에 남았다. 아버지에게 그때 일을 기억하는지 묻고 사과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사라졌다.
"아빠 오지 마"라고 했던 그날.
나보다 2살 많은 옆 집 형이 자신의 아버지와 손을 잡고 걷는 것을 봤다. 서로 마주 보며 밝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는 어색하고 당연하지 않은 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일 수 있음을 알았다. 그 모습이 부러웠다. 그 형과 아버지의 친구 같은 모습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았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갖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아들이 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가 불편했다.
엄마가 일어나라고 한참을 깨워도 뭉그적거리다가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면 단 번에 일어나서 정신을 차렸다. 식사 때에는 예의범절 교육이 이뤄졌다. 식사는 어른이 먼저 시작하고 나면 해야 된다! 밥풀 남기지 말고 깨끗이 먹어야 한다! 밥상 앞에서 누우면 안 된다! 동네 어른들 만나면 인사 잘해라! 내가 잘해야 남들도 나에게 잘한다! 등! 등! 등!. 지켜야 할 것들을 무표정하게 말하는 아버지가 어린 나는 무서웠다. 괜히 혼날 것 같은 마음에 아버지가 있는 자리는 조심스레 피했다.
단지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무뚝뚝하고 어색했을 뿐인데 그 어색함이 불편함이 되어 버렸다.
사춘기를 겪던 중학교 시절 아버지와 나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우리는 마치 자석의 N극과 N극 같았다. 같은 공간에서 둘이 마주하면 한 명은 자연스레 다른 공간으로 밀려났다. 아버지는 식사 시에 했던 예절교육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중학교 3학년 때 학생주임 선생님이엄마를모시고 오라고 해서 불려 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날까 걱정했다가 아무 말없는 아버지의 모습에 서운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함께 살았지만 점점 멀어져 갔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대화 없는, 살갑지 않은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도 나와 같지 않았을까?
나 역시 아버지에게는 불편한 아들이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51세.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환갑이 넘으셨다. 막내아들 대학 보내느라 환갑이 지나서도 쉴 틈 없이 일하셨다. 고마움도 알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돈 많은 집에 태어났으면? 젊은 부모님 집에 태어났으면?' 그런 생각을했다. 그때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땐 그랬다.
내 나이가 서른을 넘기자 부모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숙제는 막내아들이 장가가는 것이었다.
"결혼을 해야되껀디. 어쩌끄나?"
"사귀던 사람은 잘 만나고 있다냐?"
"저러다 장가도 못 가믄 어쩐다냐?"
막상 나에게는 하지 않은 말을 누나, 형에게는 수없이 했단다.
결혼식날 내가 신나는 음악에 축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영상 속에 찍힌 아버지는 울고 계신다. 아버지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시간이 지나 내가 나의 아들을 장가보낼 때쯤 이해하게 될까?
내가 결혼하고 손주까지 안겨드리자 아버지는 "나는 인자할 것은 다 했응게 언제 가더라도 서운할 것 없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셨다.
결혼하기를 잘했다. 부모님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가족이 주는 의미, 소중함을 요즘 더 깨닫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긴 슬프고 허한 마음의 공간을 가족들이채워주고 힘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