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서 떠났지만 아버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마주할 수 없지만 아버지와의 기억을 꺼내어 오늘도 그를 만난다.
내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는 춤바람이 났었다. 그때는 몰랐다. 춤바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비' '작업남' '바람'
나중에서야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춤바람의 이미지는 그랬다.
아버지의 종목은 지르박이었다. 시골에서 주업이 농사인 아버지에게 내가 학교에 가있는 시간은 춤추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서 음악이 '뽕짝뽕짝' 눈치 보지 않고 밖으로 새어 나왔다. 번번이 춤출 곳도 없는 시골은 방 안이 무대이자 업장이었다. 오늘은 우리 집. 내일은 이웃집. 가끔은 원정으로 옆 동네까지 다니기도 했다.
춤을 출 때의 아버지는 유쾌하고 웃음도 가득했다. 키도 크고 인물도 빠지지 않은 아버지는 춤출 때 돋보였다. 지르박이 단순해 보이지만 잘하는 사람들은 남다른 리듬감이 느껴진다. 아버지가 그랬다. 한동안 아버지는 춤바람이 심하게 났었다.
"느그 아빠 춤바람 나서 큰일 났다. 잘 단속해야 긋다."
같이 춤추러 오셨던 분들은 웃으며 나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백구두를 신고, 칼라풀한 정장을 입고, 유부녀를 꼬시고, 상대 남편이 쫓아오고, 숨고, 도망가고, 결국 들통나서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고, 가족에게 외면받고, 다행히도 티브이를 통해 봤던 그런 춤바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지르박은 부부동반이었다. 부부끼리 함께 모여 동반으로 춤을 배우고 췄다. 엄마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춤추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다 가고 나면 두 분은 부족한 부분을 연습했다. 내가 엄마 아버지를 통해 본 춤의 이미지는 건전했다. 두 분에게 춤은 즐거운 운동이었다.
드라마에서 봤던 차림새와 외모를 가진 남자분이 가끔 등장하긴 했다. 그분은 오셔서 사람들에게 단체 레슨을 했다. 왠지 그분은 티브이 속 주인공 같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나중에 드라마를 보며했었다. 레슨이 없는 날은 아버지는 지르박을 책으로도 공부했다. 그 책에는 발자국 모양으로 친절하게 스탭이 안내되어 있었는데 어린 나에게는 그 그림이 마치 게임설명서 같았다. 심심할 때면 나는 지르박 책을 보면서 그림 속 발자국 모양대로 걸어보곤 했다.
나는 소싯적 방송과 공연분야에서 일했었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르박을 배울 일이 있었는데 강사님은 나에게 끼가 있다면서 제법 잘한다고했다. 칭찬을 들을만했다. 나는 지르박을 조기교육을 받은 셈이었으니까.
춤을 추던 시간은 내가 살아오면서 본 아버지의 모습 중 가장 신나고 즐거워 보인 때였다. 아버지는 한동안 열정적으로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 그만두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 야유회를 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들 지르박을 배워서 잘 추는데 아버지만 못하더란다. 그래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아버지는 자기만 배우러 다니면 이상해 보이니 엄마도 같이 배워둬야 한다며 꼬셨다. 몸으로, 책으로 열심히 배워 야유회에서 빠지지 않을 실력이 되자 집에서는 더 이상 지르박을 추지 않았다.
하지만 야유회에서의 아버지는 제대로 배운 춤을 멋지게! 열정적으로 실력 발휘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취미 생활, 또는 하고자 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알게 되었다. 직장일과 육아에 지쳐 내가 사라지는 기분을 느낄 때면 결혼을 한 것이 잘한 것인가? 싶을 때가 있다. 온전히 나라는 사람의 욕구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아버지는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티고 헤쳐 나왔을까? 그 고단했을 시간을 책임감 있게 잘 이겨내 준 아버지에게 감사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도 아내도 우울에 빠졌다. 생전에 아버지는 며느리와 대화를 호탕하게 잘하셨다. 결혼하고 몇 년 동안, 내가 평생 아버지와 나눈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대화를 며느리와 나누는 것 같았다.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나도 들어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곤 했다. 그런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했지만 나 보다 며느리와 더 친해 보이는 모습에 묘하게 심통이 나기도 했다.
아버지가 떠나고 아내는 나만큼이나 많이 울고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여수에서 함께 지낸 한 달의 시간은 집안 곳곳에 아버지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있었고 식탁에도 앉아있었다. 거실을 지나 화장실로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기도 했다. 함께 지낸 한 달의 시간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더 크게 느껴지게 했다.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우리는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게 아이들에게도 느껴졌나 보다. 어느 날 밥을 먹는데 6살 딸아이가 "할아버지 하늘나라 갔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야지~"라는 말을 했다. 농담처럼 아이들에게 "나중에 아빠가 나이 들어서 하늘나라 가면 계속 슬퍼하지 말고 아빠하고 보낸 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많이 웃으면서 살아야 해"했던 말을 딸은 기억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그래 아버지와의 시간을 기억하고 간직하되 행복하고 즐겁게 살자.
학창 시절 댄스스포츠를 했던 아내는 연애 시절부터 항상 나에게 결혼하면 언젠가 나와 파트너가 되어 댄스스포츠를 추고 싶다고 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울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단이 필요했던 우리는 아버지와 엄마처럼 함께 춤을 추기로 했다. 결혼하고도 8년이나 미뤄온 아내의 희망사항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아내와 내가 춤을 춘다. 아버지와 엄마가 함께 지르박을 추셨던 것처럼.
우리는 지르박이 아닌 '댄스스포츠'를 춘다.
저녁을 먹고 우리 가족은 댄스학원을 간다. 아내와 나는 열심히 50분 동안 춤을 배우고 연습하고 한바탕 춘다. 아이들은 책을 보기도 하고 놀기도 하다가 우리에게 와서 엄마 아빠의 춤추는 모습을 본다.
아이들은 나중에 엄마아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춤추던 장면을 떠올리겠지. 내가 엄마, 아버지의 춤추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이해하고 더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면 서다. 아마도 내가 아빠가 되지 않았다면 평생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로서 책임감과 무게감을 몸소 느끼면서 아버지의 지나간 시간들에 공감하게 되는 것들이 하나씩 늘어간다.
아버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부양할 가족이 없었다면 무얼 하셨을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어떤 취미생활을 했을까?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무얼 배우고 싶었을까?
궁금한데 이제는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들..
잠들기 전 나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어릴 적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생각을 들려주면 아이들은 궁금증이 생겨 질문을 줄줄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