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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솬빠 Nov 01. 2024

아버지의 대성통곡

아버지와의 기억을 꺼내어 오늘도 그를 만난다.



중학교 2학년 겨울.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방 안에서 부모님이 격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엄마와 아버지의 서러운 울음이었다.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두 분은 울면서 마음을 쏟아냈다.


이제 대학교를 입학해야 하는 장남. 그는 원했던 사범대 수학과를 포기했다. 학비가 비싼 사립대에 갈 형편이 못 되었다. 더군다나 가족 중에 아무 연고 없는 지역이라 방도 구해야 했기에 마음을 접었다. 형은 경기도의 전문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방을 얻어 줄 여유도 안 되었기에 형은 서울의 누나집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큰누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두 명이나 있었다. 그런데 방도 2개뿐이었다. 그것이 아들에게도 딸에게도 사위에게도 스러워서,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에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아이고 아들 방도 하나 못 해주고, 내가 돈도 못 모으고 어찌 이렇게 살아왔으까"

아버지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울음과 섞어 쏟아내며 자신의 삶을 질타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이 아닌 곳에서 성인 남자가 그렇게 서글프게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울음도 낯설었지만 그가 그토록 미안해하는 모습에 많이 놀랐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교통사고로 잠시 의식불명 상태였을 때도 아버지는 이렇게 울지 않았다.


아니, 내가 보지 못한 거겠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몰래몰래 수없이 눈물을 흘렸을 텐데 그날은 나에게 들켜버린거겠지.


그날의 눈물을 본 이후 나는 금전적으로 집에 부담이 되는 일은 스스로 미리 걷어내고 다른 방향을 찾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진로 선택의 시간이 왔을 때 나는 아버지와 엄마 그때 그 눈물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지방국립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걸 선택했다. 내가 첫 번째로 희망던 전공은 아니었지만 두 분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런데 정작 입학을 하고 학교를 다니게 되자 후회가 시작됐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온전한 나의 선택이었는데 마음 한편으로는 나의 선택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날 '내가 부모님의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내가 차라리 그 눈물을 몰랐다면,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있었다면, 내가 대학을 선택할 때, 하고자 하는 것을 선택할 때 조금 달랐을까? 돈 때문에 마음을 접어야 했던 상황들이 생각날 때면 그날의 목격이 후회다.


장학금을 놓치면 부모님의 부담으로 직결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학생활 내내 성실하게 출석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여 통장에 돈이 모이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마음이 솟구쳐 올라왔다.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꿈을 좇았다. 늦게 시작하여 힘들고 고달픈 시간이기도 했지만 인생에 있어 의미 있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이 지금 나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경험이 바탕이 되어 돈도 벌고 있으니 미련과 후회는 사그라들었다. 


어린 마음에 우리 집보다 좋은 환경을 부러워하장인 아버지의 능력을 못마땅해하던 적이 있었다.


부족한 경제력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능력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원망의 대상이 된다. 그날 아버지성통곡 듣게 되어서,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아직 나의 아이들이 원하는 것에 금전적으로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능력의 한도 초과로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는 상황 맞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기가 오면  역시 아버지처럼 나 자신을 질타하게 되겠지..


그런 순간이 지 않도록 오늘도 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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