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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 쿤데라 Aug 04. 2023

등산

오늘은 오랜만에 등산을 했다. 집 근처에는 불곡산이 있다. 정상까지 왕복하면 대략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등산을 하면 좋다.


오르막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부스럭 소리가 났다. 불곡산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사는데, 청설모, 다람쥐, 다양한 크기의 딱따구리들, 직박구리, 다른 여러 새들과 길앞잡이도 산다. 가끔 고양이도 보인다. 그런 동물들을 지켜보는 것은 재미있다.


길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는 비교적 넓은 구간이었는데, 나와 엄마는 그중 가장 오른쪽 길을 걷고 있었다. 부스럭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저 앞 가까이서 커다란 개가 내려오고 있었다. 개 같이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기에 산에 개가 돌아다니는 것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목줄이 없었다. '요즘 사회 분위기에 정신 나가지 않은 사람이라면 저런 대형견을 풀어둔 채 산책하지는 않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개따라오는 주인을 고대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따라 내려오지 않았다. 황토색과 검은색이 섞인 얼룩덜룩한 큰 개였다. 귀는 쫑긋 솟아있고, 주둥이는 튀어나와 있었는데, 목에는 보통 목줄로 쓰이는 벨트가 감겨있었지만 사람과 이어주는 줄 대신 30cm 정도의 뭉툭한 고무처럼 보이는 검은색 막대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개는 세 갈래 길 중 가운데 길로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엄마보다 앞서 걷고 있다가 목줄 없는 개를 발견하고는 즉시 엄마에게 말했다. "소리 내면 안 돼. 목줄 없는 큰 개가 있어."  무렵 개는 우리와 교차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엄마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보냈고, 절대 소리치지 말고, 뛰지 말라고 당부하며 개를 주시했고, 계속 걸어갔다.


얼마 뒤 개는 등을 보이며 사라졌고, 이제 갔구나, 하고 안심하는 순간 다시 얼굴을 드러내며 방향을 바꿔 내 뒤를 따라 올라왔다. 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에서는 드뷔시의 프렐류드가 나오고 있었는데, 그 음악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형광 주황색의 옷을 입어서 눈에 띄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개는 나와의 거리를 점점 좁혀 오더니 내 왼 다리를 스치며 결국 나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바로 밑에서 헥헥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이 개가 나를 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개가 공격하면 맞서 싸우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후에 생각해 보니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죽은 척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이전에는 대형견이랑 싸우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얼마 전 개가 다른 개를 공격하는 영상을 보고는 나는 절대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개가 다른 개의 목덜미를 물고서는 고개를 마구 흔들고, 옆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리고, 걷어 차고, 전기충격기로 지지고, 들었다 팽개쳐도 그는 절대 놓지 않았다. 개는 공격력도 그렇지만 맷집이 매우 세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이 잠시 두 개를 떼어놔도 다시 번개같이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었다. 멧돼지와 죽기 직전까지 싸우는 개도 있기에 사람이 아무리 공격력과 방어력이 좋아도 개의 지구력과 집요함은 이기지 못할 것 같다. 좌우간 엄마는 계속 나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그런데 개가 위협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없지만 이 개는 내가 좋아서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목덜미와 얼굴을 만져주며 귀여워해주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었지만, 최대한 하던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으면 물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바로 포기했다. 그렇게 한 1, 2분이 지났을까, 개는 어느샌가 발길을 돌려 나를 떠나갔다. 내가 한 것이라곤 그저 평소처럼 적당한 속도로 걸어간 것뿐이었다.


다시 엄마와 만났다. 엄마는 걸어가는 내내 내가 다치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만약 개의 공격을 받고 쓰러졌으면 엄마는 소리를 질렀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소리를 지르면 상황이 더 악화될 텐데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걸은지 십분 쯤 지났을까, 반대편에서 등산객 복장에 무전기로 무전을 하며 걸어오는 아저씨가 시야에 들어왔다. 손에는 굵직하고 한쪽 끝이 구부러진 나무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아저씨가 먼저 우리에게 개를 보지 못했냐고 물어봤다. 우리는 개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주며 아까 본 그대로 말했고, 사나운 개냐고 물어봤다.


"사납지는 않은데 돼지 잡는 개예요. 근데 교육이 덜돼서......" 그리고 목에 달린 그 검은색 고무로 보이는 막대는 목줄이 아니라 GPS라고 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우리가 왔던 길로 걸어 내려갔다.


'돼지 잡는 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양치는 개 비슷한데 양 대신 돼지를 모는 개인가....... 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멧돼지 잡는 개였던 것 같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그 개의 견종은 셰퍼드였다.


201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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