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2시 24분경이었다. 전망대 의자에 앉아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찰나 귀청이 떨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가 어디선가 터져 나왔다. 음이 연속적으로 높아졌다 낮아지길 반복하는 사이렌 특유의 소리와 따발총처럼 울리는 종소리.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정말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엔 밖에서 나는 소린 줄 알았다. '뭐지? 공습인가? 대통령 바뀌었다고 북한이 쳐들어왔나?' 그런데 소리는 수영장 안에서 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뛰어내렸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 공습경보 따위가 오진 않았나. 몇 발자국 걸어갔다. 의무실을 향해. 의무실에선 다른 라이프가드 선생님이 점심식사를 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핸드폰엔 아무런 알림도 와있지 않았다. 뛰었다. 수영장 모서리를 돌았다. 놀라서 뛰쳐나온 가드 선생님과 상황파악을 위한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우리 둘 다 무슨 일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드 선생님은 여자탈의실로 뛰어들어갔다.
공격적으로 호루라기를 불며 50여 명의 사람들을 물 밖으로 내보냈다. 웬일이냐고 묻는 사람들. 모른다고 했다. 수영장에서 모두가 나온 것을 확인한 후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대리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역시 받지 않는다. 그때 가드 선생님이 오셨다. 오작동이란다.
급작스럽게 배가 아프거나,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 자빠지거나,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거나, 무서운 이야기를 읽으면 평화롭고 고요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나를 해치려는 지옥으로 바뀐다. 카메라에 필터를 씌우듯이.
자유수영 시간이었다. 두 시간의 강습 후 강사님들도 다 퇴근하고 한 시름 마음이 놓이는, 짓눌려 있던 어깨가 가벼워지는 시간. 다른 가드 선생님은 십오 분 정도 잠시 점심식사를 하는 시간. 조금만 더 지나면 지독한 소독약에서 해방되는 시간. 나른한 오후. 그런 때에, 이런 평화로운 세상에 처음 들어보는 그런 공습경보 같은 사이렌은 너무나,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가짜 같았다. 불행의 시작이 이런 모습이리라 생각했다.
돌발상황이 되니 사람들의 반응이 참 다양했다.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쪼르르 달려 나가는 할머니들,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영하는 할머니(지금 생각해 보니 심지어 걷는 레인이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 로비에 나갔다 오신 가드 선생님은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탈의실 입구에서 바로 튀어나갈 준비를 하는 할머니들과 팬티 차림으로 나오신 할아버지를 봤다고 하셨다.
'총각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왜 나오라 그래.' 어느 할머니가 내게 한 말이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까 나와야죠.' 내가 답했다. CPR 배울 때 강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심폐소생술 하고 있으면 옆에서 훈수를 그렇게 둔다고. 그런데 막상 '그럼 직접 해보실래요?' 하면 다들 피한다고. 또 자동 심장충격기로 심장충격 실시 중 옆에서 잘 모르는 사람이 버튼을 눌러 구조자가 전기 충격을 받아 뒤로 쓰러져 뇌진탕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이프가드를 괜히 두 명이나 배치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2017.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