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구제로부터 딱 한 달 뒤 오늘. 오늘 밤도 그믐달이 뜬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제는 2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나랑 내 동생이 엄마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쭐이 나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놀라며 엄마를 제지시킨 후 우리를 달래 주곤 하셨다. 그런 외할머니의 따뜻함 때문이었을까? 엄마가 우리를 야단칠 때보다 외할머니가 다독여 주실 때 더 많이, 더 크게 울곤 했다.
오전에 외할머니가 나갈 채비를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던 기억이 있다. 외할머니에게 어디 가시냐고 여쭈어 보았다. 불교 신자였던 외할머니는, 심인당에 가서 불공을 드리러 간다고 했다.
“불공? 그거 뭐 하는 거예요?”라고 어린 내가 물었다. 그 땐 모르는 것도, 궁금한 것도 참 많았다. 그런 나를 보며 외할머니는, “우리 나원이 훌륭한 사람 되어라고 하는 거야. 지금까지도 나원이가 잘 해 왔는지 오늘 부처님께 물어보려고”
지금 생각해 보니 애기한테 맞춤형 답변을 참 잘 해 주셨다며 얼마 전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를 회고했다 ^^… 이제는 불공이 무엇인지, 불교 철학의 의미도 조금은 알아버릴 만큼 훌쩍 커 버렸지만.
불교와 불공은 삶의 고통과 고독에 대한 외할머니만의 대응 방식이지 않았을까. 외할머니는 그 속에서 감사와 사랑 또한 느꼈을 것이고, 이를 고스란히 포근함으로 우리에게 표현해 주셨던 듯하다. 아직도 이건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장례를 치른 후, 일정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빠르게 평상시대로 지내도 괜찮은지 의문이기도 했지만 별 수 없었다. 출근을 하여 업무를 봐야 했다. 골프 라운딩도 나갔다. 함께 상을 치렀던 우리 또래 사촌들과, 장례 때는 하지 못했던 건배를 하며 집들이 파티를 하기도 했다. 취기와 죄책감이 올라왔으나 둘 다 애써 눌렀다. 일상 속 각각의 때마다 표정과 말을 달리 했다. 하지만 외할머니를 떠올렸다는 것만큼은 같았다.
밤마다 기도를 드리며 꼭 눈물을 주르륵 흘리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 눈물이 멈추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흘러가며 매일 밤 올리던 기도를 빠뜨리는 날도 생겼다. 그렇게 기일로부터 사십구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십구재날의 밤은 가장 보기 힘들다는 차가운 그믐달이 떴다. 사십구재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실의 슬픔을 그리움으로 수용하는 기간이라고 배웠다. 수용과 망각을, 혼동하던 때도 있었다. 초승달과 그믐달을 구분 못 했던 시절. 불공이 뭐냐고 묻던 그 때.
사십구재 기간 초반에는 우리 외할머니 좋은 곳으로 가게 해 달라 빌었다. 중반 무렵부터는 가시는 길도 내내 온화하고 평안하기를 기도했다.
기도를 올리며 늘 하늘을 올려보곤 했다. 거의 대부분의 하늘은 흐렸다. 평년 대비 유난히 비가 오는 날이 많았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외할머니의 따스함으로 채워 달라 빌었다.
이제 외할머니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지만, 우리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도 언젠간 멎는다. 그래도 달은 계속해서 차고 기운다. 늘 그래 왔듯.
눈을 감아 본다.
아주 먼 훗날, 재회의 날이 온다면 외할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아이고, 우리 아가 왔나? 욕봤다”
외할머니, 그때는 제가 따뜻하게 안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