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모임에서 들은 한 남자분의 이야기가 잊혀 지지 않는다. 그분은 대학 시절 시골 어머니가 싸 주신 김치통을 들고 지하철에서 내리다 그만 떨어뜨렸단다. 용량보다 많이 꾹꾹 눌러 담은 김치통은 데구루루 굴러가면서 저만치에서 쏟아졌단다. 그 남자분은 너무 창피해서 자신의 것이 아닌 양 앞만 보고 모른 척 걸어 나왔단다. 함께 듣던 사람들은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분의 이야기에 깃든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나 역시 그때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휴대폰의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다. 무슨 일인지 반은 알기에 선뜻 받고 싶지 않다. 몇 번의 벨이 더 울리고 나서야 받았다.
“택배 오늘 부쳤으니 내일 오면 받아라.”
“아니 왜에…”
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엄마는 전화를 먼저 끊으신다. 딸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시기에 서둘러 본인이 먼저 대화를 마무리하시는 거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좋으신 게 택배란다. 택배가 없었으면 이고 지고 차에 실어 가야 하는데 너무 편하다는 것이다. 인정머리 없는 딸은 친정에 자주 가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엄마는 내게 주실 것이 너무 많다. 내가 올 때까지 눈 빠지게 안 기다려도 택배 상자에다 주시고 싶은 걸 다 담을 수 있으니 너무 좋으시단다. 그때는 그 택배 상자가 딸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마음이라는 걸 몰랐었다.
아주 오랫동안 엄마의 택배는 나에게 짐이었다.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포장된 택배가 현관문 앞에 도착하면 들고 들어오는 것조차 간단치가 않았다. 너무 무거워서이다. 주기적으로 보내시는 각종 김치, 연근조림, 콩조림, 채소 부각부터 다듬은 알 배추, 씻은 무, 비닐과 고무줄로 꽁꽁 싸맨 참기름과 들기름, 직접 담근 고추장, 강된장. 택배박스 안에는 빈틈이 없다. 조그만 빈틈이라도 보이면 굵은 대파 하나라도 싸서 틈을 메운다. 그 박스가 어찌 가볍겠는가?
바윗덩어리 같은 박스는 내게 엄마의 욕심처럼 느껴졌었다. 뭐든 손 크고 욕심 많은 엄마를 어릴 때부터 이해하지 못했던 딸이다. 그 박스는 타협 없는 엄마의 욕심이 옹골차게 들어찬 공간이었다. 풀고 정리해서 우리 집 냉장고에 넣는 일도 저녁 시간이 다 가도록 해야 하는 노동이었다. 특히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와야 하는 날이 겹치면 부엌 베란다에서 박스는 열리지도 않은 채 며칠째 방치되기도 했었다. 문제는 그 음식을 다 먹어내지도 못하고 있는데 다음 박스가 온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였으면 감히 생각도 못 하지만, 엄마이기에 나는 전화를 받는 날이면 짜증을 내면서 그만 보내라고 아우성을 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사지 말고 천천히 먹어. 다 맛있게 만들었어.”
라고 나를 달래듯 말씀하신다. 집안일을 하나도 안 가르치고 시집 보낸 딸이 아직도 못내 걱정되시는 거였다. 게다가 음식 만드는 건 더 싫어해서 솜씨가 젬병인 딸이다.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까탈스러운 품 안의 자식이었고 영원한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며칠 전 엄마의 택배를 갑자기 받았다. 현관문 앞에 놓인 익숙한 아이스박스를 들어 올렸다. 너무 쉽게 들어 올려지는 가벼운 택배 상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택배 상자 속에는 본인이 선물로 받은 벌꿀 한 통과 가짜가 많다고 항상 아는 집에서 짜 보내시는 들기름 2병, 그리고 들깨가루 한 봉지가 다였다. 그렇게 보낼 택배가 아니었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는 작년부터 다리와 허리가 불편하셔서 병원에 다니신다. 당연히 집안일이 예전 같지 않으시고 주위에 사는 자식들의 도움을 받고 계신다. 요즘은 더 심해지셔서 모두가 걱정하고 있다. 근 30여 년간 지속된 엄마의 택배사랑은 작년부터 멈추었다.
냉장고의 밝은 불빛 앞에 서면 나는 마음이 어둡게 텅 비어 간다. 나이 많은 딸은 그제야 철이 들었다. 누군가 엄마의 택배는 멈춘 게 아니라 잠시 쉬고 있다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다시 바윗돌같이 무거운 택배 상자를 툴툴거리며 들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인 것도 안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것들로 상자에 꾹꾹 눌러 담아서 들고 가야겠다. 웬일로 살가워진 딸에게 다 먹지도, 쓰지도 못한다고 웃으시며 손사래 치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