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사 왔을 때는 아파트에서 조성한 작은 쉼터인가 했다. 1층 아파트 출구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 곳에 정원용 계단이 있다. 야자수 매트를 깔아 놓고 목조 난간이 있는 계단은 살짝 운치마저 풍긴다. 계단 아래 내려서면 시에서 관리하는 빛솔공원이 나온다. 그곳을 오르내릴 때마다 나는 두고 온 계절의 기억을 떠올릴 때가 많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푸른 사철나무 위에 쌓인 눈의 무게가 걱정되었고, 입구부터 공원 끝까지 이어진 벚꽃 터널로 인해서 찬란한 봄은 밤을 잊게 만든다. 온통 초록, 초록으로 무성한 나뭇가지들은 뜨거운 하늘을 뒤덮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벤치에 머물게 한다. 툭, 하고 발밑에 작고 푸른 감이 하나 떨어질 땐 또 다른 색으로 다가올 또 다른 계절을 예감하게 한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공원이 텅 빈다. 그래도 나는 우산을 들고 굳이 공원으로 내려간다. 걷다 보면 나를 따라오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만나기 위해서 해가 진 저녁에도 나는 우산을 든다. 골목을 돌아서 내 이름을 부르며 사라져 가던 친구의 목소리, 젖은 옷을 벗고 마당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치는 동생들, 부엌에서 밀려 나오는 엄마의 큰 소리, 그리고 마루 끝에 앉아 그 장면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나. 기억 속의 어린 나는 언제나 말이 없다. 그날도 비가 오는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홈통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마음은 건조한데 세상은 조용히 물기 먹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반질반질한 어두운 색깔의 대청마루는 물기를 머금은 채 더욱 어두운 색조를 띄며 주변 사물을 붙잡고 있었다. 만화책도 TV도 아닌, 비가 오는 마당을 나는 한 시간째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외출하고 없는 텅 빈 집에서 유월은 빗소리와 함께 말을 걸어왔다.
댓돌 위에 아무렇게나 뒹굴어져 있는 슬리퍼들을 바라보며 식구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서 빨리 저 녹이 슨 초록색 철 대문을 열고 나를 부르며 들어오길 바랐다. 자주 그런 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비가 오는 여름날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멀리서 아득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라하고 긴 기다림이 지나고 있었다.
대청마루에서 눈을 떴다. 분명 아침이었다. 그리고 그 노곤하고 어슴푸레한 빛은 늦은 아침 같았다. 나는 갑자기 울음이 나왔다. 분명 학교 갈 시간이 넘은 것 같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순간, 아무도 이 불행을 함께 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공포와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초록 대문이 열렸다. 학교에 늦었다고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들어오시는 엄마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꿈을 꿨구나. 오늘은 학교 가지 말지 뭐. 엄마가 금방 저녁해서 줄게”
‘저녁? 아, 아침이 아니구나!’ 그 순간의 안도와 반가움이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아직도 마당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빛솔공원에 내려서면 나는 놀라 울고 있는 그때의 어린 나를 만난다. 비 오는 풍경을 혼자서 바라보기 좋아했던 내향적이고 생각이 많았던 어린 나. 그러면서 아직 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며 마루 끝에 앉아 있던 나. 우산을 쓰고 빛솔공원을 걸을 때면 그때의 내가 조용조용 말을 걸며 따라온다.
어른이 된 지금도 아주 가끔, 낮잠 끝에 소스라치며 놀랄 때가 있다. 특히 비가 오는 여름날이면 알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그리움이 함께 밀려온다. 분주하게 계절을 보내며 어른이 되어 갔지만 유월만 되면 아직도 덜 자란 내가 열리지 않는 초록 대문을 바라보고 있다. 봄의 화사함과 요란함을 보낸 유월은 항상 나에게 ‘잠깐만!’이라고 말을 건네듯 다가온다. 빗물에 젖은 풀숲을 바라보며 잠시 기다렸다 가자고 한다. 그때, 공원의 가로등에서는 하나둘씩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