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도착한 곳은 포항시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일부러 찾아온 낯선 곳.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왔지만, 주변의 살풍경은 나를 무장 해제시키지 못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엔 각자의 사연이 묻어난다. 내 마음의 분주함은 그들을 편히 바라볼 아량을 만들지 못했다. 여긴 아니었다. 목적지를 다시 정하기 위해 매표소 위에 걸린 상행선 시각표를 살폈다.
며칠 동안 마음의 부침이 심했다. 난 원래 움켜쥐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아니, 더 자세히는 경쟁의 상태를 못 견뎌한다. 그런 나를 별나다고도 하고, 특이하다고도 한다. 무언가 혼란스럽거나 다툼의 상황이 생기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그냥 손을 놔 버린다. 깨끗이 포기하고 물러나기 일쑤다. 생긴 건 우악스럽지만 신경은 모기 줄 마냥 얇디얇다. 하지만 그것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집을 나선 새벽은 어두웠다. 어두운 하늘은 짙푸른 바다를 닮았다. 그 하늘의 한쪽 구석에는 여린 하현달이 창백하게 걸려 있었다. 검은 그림자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수초처럼 주변을 일렁였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코끝에 바다 내음이 묻어났다. 차가운 서리처럼 부서지는 공기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매표소에 지폐를 들이밀고서 30분 뒤 출발하는 ‘영해’ 가는 버스표를 다시 끊었다. 나는 그곳이 어딘지를 모른다. 지명이 바다를 품고 있는 듯했다. 그곳쯤 가면 동해를 보리라 생각했다. 그뿐이다. 버스는 동해안 해안 도로를 타고 올라갔다. 잔뜩 흐린 하늘을 이고 움직이던 버스 창밖에 드디어 바다가 드러났다. 낮은 집들이 보이고, 소나무 숲이 보이고, 작은 학교가 멀리 보였다. 오른쪽 마른 들판 끝에는 바다의 수평선이 보이다 말다 했다. 나는 버스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여러 개의 간이 정류소를 지난 후 영해에 도착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시골의 작은 터미널이었다. 나를 포함해 예닐곱 명만 버스에 남아 있었다. 주섬주섬 각자의 삶을 구겨 넣었을 짐들을 지고 내렸다. 나는 두꺼운 갈색 코트에 검정 핸드백이 전부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다 내음이 바로 코끝에 훅 끼쳐 들어왔다. 제대로 온 것이다. 터미널을 나서자 작고 옹색한 식당들이 늘어선 읍내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를 걷지 않아 바다가 바로 나타났다. 아, ‘겨울 바다’다. 겨울의 바다는 그 푸름을 잃지 않았다. 한없이 넓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철이 지났음에도 날 것 그대로의 자태로 파도조차 조용히 잠재웠다. 고요였다. 파도는 고요가 묻는 소리에 대답만 할 뿐이었다. 영해의 바다는 나에게도 조용히 물었다. 힘드냐고. 잠시 대답을 못 하고 있는 내게 갑자기 바닷물이 밀려와 발목을 적셨다.
그때 눈앞에 눈송이가 날렸다. 바다에도 눈이 내릴 수 있는 거구나. 눈은 하염없이 내렸지만, 바다도 하염없이 받아들였다. 물결은 그대로 짙푸르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지나갈 거야.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바다가 자꾸 말을 건넨다. 그래서 불렀다고. 한번 들렀다 가라고. 나는 눈 내리는 물결 위에 아리고 뭉친 마음을 하나씩 던져 넣었다. 내 마음에는 바다가 주는 고요가 내려앉았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터미널 주변의 한쪽 구석에 작은 분식집이 보였다. 국수 한 그릇을 시키고 나니 그제야 나는 한기에 떨고 있었음을 느꼈다. 뽀얗게 김이 오른 국물이 온몸을 녹였다. 바다가 대접하는 한 끼 식사라고 생각했다. 근처 골목에 있는 옷 가게도 들렀다. 외지 손님인 줄 단박에 알아챈 가게 주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이 가득하다. 나는 벽에 걸린 줄무늬 블라우스를 골랐다. 역시 바다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다는 나를 다독였다.
거리에는 쌓이지 않은 눈들이 녹고 있었다. 그래, 쌓아 놓을 필요가 없지. 바다가 그랬듯 흘려보내 버려야지. 줄무늬 블라우스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포항행 버스표를 끊었다. 다시 거슬러 돌아가는 거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무거웠지만 버스 안은 따뜻했다. 버스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나는 까무룩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포항 시외버스터미널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여전히 낯선 풍경이었지만 맘이 편했다. 갑자기 누군가 등을 툭하고 치며 말을 건넨다.
- 어머, 여기서 다 뵙네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낯선 곳에서 낯익은 지인의 놀란 인사를 받는다. 말갛게 씻긴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한다. 후에도 자주 바다는 내 엄마처럼 나를 씻기고 든든히 먹여서 집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