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영토

by 김혜진

가을이 내려앉은 운동장 끝에 긴 땅거미가 늘어진다. 학교 담장 울타리의 줄 지어선 측백나무 사이로 주황빛 깊은 노을이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돌아간 운동장 흙바닥에 앉아 나는 납작하고 작은 돌멩이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내 앞 흙바닥에는 커다란 원이 그려져 있고 원 속에는 수많은 손바닥 자국과 선들이 작은 공간을 이루며 커다란 원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왜 다른 아이들처럼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있을까? 무엇을 응시하고 있을까?


체육대회나 야유회를 가면 나는 곧잘 하는 말이 있다.

‘저는 운동신경은 반납하고 이 세상에 왔어요.’

물론 모든 행동에 굼뜨고 동작 느린 나를 위한 변명이다. 골방이나 구석에 박혀 책 읽기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 서글픈 것은 어려서부터 내 주위 모든 사람이 인정했고 왜 그런지 묻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나는 그것에 대해 자책하거나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을 부러워한 적은 없다. 운동을 잘하고 빠릿빠릿한 나는 내가 생각해도 내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경험과 기억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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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가 가까웠던 우리 집 덕분에 학교 운동장은 나와 내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지금처럼 동네마다 놀이터가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시골이라 아이들의 방과 후를 책임지는 태권도장이나 학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몰려 나가곤 했다.

‘오징어 게임’ ‘사다리 게임’ ‘잡기 놀이’ ‘공기놀이’ ‘숨바꼭질’ ‘고무줄놀이’...

활동적이지도 않았고 운동신경이 없었던 나를 친구들은 마지막 히든카드로 놀이에 끼워 주었던 것 같다. 별로 움직이지 않으니 잡히지도 않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나조차도 놀이에 참여하여서 기여했다는 생각에 맘이 뿌듯해졌다.


그런 내게 승부욕 아니, 참여 의지가 불타오르는 놀이 두 가지가 있었다. 바로 ‘공기놀이와 땅따먹기’이다. 당연히 앉아서 꼼지락거리는 놀이이니 나에게는 최적화된 놀이다. 그리고 잘했다. 잘했으니 당연히 좋아하는 놀이였다. 지금은 공깃돌이 플라스틱으로 색색깔 예쁘게 팔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모두 운동장에서 작고 예쁜 돌들 다섯 개를 모아서 했다. 공기놀이는 실내와 실외를 구분하지 않고 놀 수 있었고, 추워지기 전까지는 밖에서 하고 추워지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여자아이들의 놀이다. 손가락이 길었던 나는 공깃돌을 손등 위에 많이 올려놓을 수 있었고 뒤집어 많이 잡아낼 수 있어서 점수를 많이 내곤 했다. 하지만 정말 내가 좋아하는 놀이는 ‘땅따먹기’이다.


땅따먹기는 2명 또는 4명이 짝을 지어서 하곤 했다. 운동장 흙바닥에 아주 커다란 원이나 사각형을 먼저 그려 놓는다. 각자의 귀퉁이에 손바닥 한 뼘을 돌려서 먼저 자기 집을 만든다. 그리고 돌을 세 번 튕겨서 내 집으로 돌을 넣으면 돌이 지난 자리는 내 땅이 되는 것이다. 내 땅이 되면 원래의 내 집과 경계선을 지우고 땅을 넓힌다. 혹시 튕기던 돌이 내 집에 못 들어가면 상대에게 기회가 넘어간다. 그렇게 큰 원을 다 채우고 나면 누구 땅이 더 넓은지 비교해 보고 놀이의 승부가 나고 끝난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운동장을 못 떠나고 있는 것일까? 운동장 울타리가 노을로 물들어가도,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의 소리가 교문을 넘어 골목으로 사라져 가도 나는 혼자서 뒤풀이하는 사람처럼 텅 비어 가는 운동장에 오래 앉아 있었다. 그러곤 내가 만든 둥근 원 속에 있는 나의 영토를 바라본다. 돌을 튕기며 내 손바닥 자국들로 넓혀간 내 공간이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시간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있던 결핍을 메꾸어주는 시간이었다. 그런 내가 대견해서 마음 깊숙한 울림으로

‘잘했어, 그리고 수고했어, 혜진아!’

라고 말해 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내 손바닥으로 한 뼘씩 키워온 공간은 어쩌면 지금도 내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나를 키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공간에는 화장기 없는 말간 모습으로 내가 앉아 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는 곳, 애정이라는 말로 가슴을 후비는 말도 없는 곳이다. 때론 그 자리가 오솔길처럼 좁은 길을 지나는 때도 있지만 너른 바다처럼 나를 품어주기도 하는 곳이다. 손바닥으로 흙을 쓸며 경계를 지우는 것처럼 내 속의 온갖 경계선으로 무장한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곳이다.


가끔 나는 타인이 주는 칭찬의 말소리에 감사를 표하지만 잘 동조하지는 않는다. 의례적인 인사말 같은 칭찬 속에 녹여진 진실이 너무 아플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만든 나의 영토 속에서는 다르다. 그곳의 주인은 해 내느라 아팠던 시간 들을 함께 기억해 주고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던 길을 함께 걸어주고 힘내라고 응원해 준다. 땅거미가 진 운동장에 혼자 앉아 납작한 돌을 만지작거리던 그때의 그 아이는 지금 내 속에 앉아 그렇게 오롯이 나를 응원해 주고 있다.

모두가 물러간 뒤, 텅 비었으나 온전히 내 손길로 가득 찬 나의 공간을 바라보며 오늘도 나는 힘을 얻는다.

‘잘했어, 그리고 수고했어, 혜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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