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예상하지 못한 신호 때문에 나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예상하지 못한 파장, 파르르, 떨림에 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꼭 주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왼쪽 다섯 개의 손가락에 힘을 꽉 주었다. 간신히 진정되었다. 그녀 자신도 놀랐다. 이 선언이, 뭐라고, 이렇게 떨렸단 말인가.
걸어오는 그의 얼굴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아주 환한 웃음, 그가 웃음을 머금었다.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싱글벙글, 왜? 저렇게 좋을까? 환하게 웃는 모습이 신기했지만 그에게 참, 잘 어울렸다.
"잘 지냈어요? 나는 좀 바빴는데."
앉자마자 인사를 재빨리 한다. 좀 급하게 군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다. 뭔가 설렌 듯한 표정. 뭐가 좋을까?
"주말에 뭐 했어요?"
"그냥, 집에 있었어요. 스트레칭도 하고, 댄스 연습도 하고, 영어 공부도 좀 많이 하고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요."
그가 깜짝 놀라는 얼굴이다.
"근성 있네."
기분 좋은 칭찬이다. 그녀를 제대로 알아보는 말, 그녀는 근성 있다. 정말로.
"안 되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나는 잘 안 될 때 더 열심히 해요. 남편과 아들이 좀 놀아라, 쉬어라. 힘들어 보인다. 그래요. 난 그렇게 말했죠. 안 되니까, 더 해야 된다고. 이럴 때 더 해야 된다고."
나의 말을 들은 그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런 여자가 있나? 하는 느낌, 그가 알고 있는 여자와는 다른가 보다.
지난주 - "서로 조심하면 되죠.", "남편을 만나 볼게요. 수업한다고 다 되었는데, 남편이 남녀가 유별한데, 무슨 일대일이냐. 그래서 취소된 예도 있어요."(그녀가 4월, 한 달만 생각했다. 5월은 좀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하니, 그가 꺼낸 말들이었다.) 뭘 조심해야 되는 걸까? 참 이상한 말이다. 여자친구한테 뭐 하나 가르쳐주면 얼굴 빨개지듯이 빨개졌다, 그 말부터 그날에 연이은 말들이, 참 수상하다. 기이하다. 도대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런데도 4월, 한 달만 하고 끝내기에는 좀 아쉬운 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는 3년째 과외하는 사람이니, 오랜 세월 수업한 그녀가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었다.
지난주 수업에서, 그의 휘몰아치는 플러팅을 들은 나는, 준비한 말들을 꺼내었다.
"한국어로 하려니까, 좀 낯간지럽네요. 영어로 할게요."
그가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한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두 눈이 응시한다.
"I admire you as a my English teacher." ("저는 당신을 제 영어 선생님으로 존중합니다.")
"If you want to be a friend, I trust you as a friend."
( "만약 친구가 되고 싶다면, 저는 당신을 친구로 믿습니다.")
그녀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 그의 얼굴에는, 눈빛이, 행복한 미소로 가득 차 올랐다. 그의 눈, 입, 그의 광대가 춤을 춘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서려 있었다. 20여 년 전 그 소년을 위해, 그 소년의 모습이 투영된 그에게 최대한의 존중을 담았다. 그럼, 그가 안정감을 갖고, 수업에 집중할 것이다. 그런 기대감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의 감정을 안정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난기류가 그녀에게 몰아닥쳤다.
후폭풍이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파르르 한 떨림, 그가 이 떨림을 보았을까?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뭐야! 이 떨림! 그가 볼까 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감정이 들킬까 봐, 그녀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녀의 감정, 어디서 온 감정일까? 그녀도 알 수 없는 이 떨림은 어디에서 온 걸까? 그녀는 최대한의 힘을 손가락에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평소 같았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수업 준비를 하는 그의 오른쪽 손가락이 그녀처럼 파르르 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만 그의 파르르 한 떨림을 그녀는 보았다. 그도 파르르, 했다.
뭐지? 이 떨림. 파르르 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 손가락에게 전해진 긴장감, 뭘까? 왜일까?
그녀가 그에게 그를 존중하고 신뢰한다는 말을 하고 나서 그들에게 감지된 '파르르 한 떨림'. 그건 무슨 신호였을까? 그들 두 사람만이 알 것 같은 그 파르르 한, 떨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가 그들의 감정, 그들의 온도가 시작된 첫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모른 척하고 살았다. 말도 안 돼!
인물화를 배우고 싶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남편과 내 자녀들 그리고 내 가족들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림은 사진보다 더 분위기를 더 살려준다. 따뜻함, 나의 사랑 그리고 화목한 분위기를 그리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가족, 내 남편을, 내 자녀들을 그리고, 내가 키운 나의 가정의 따뜻함, 화목,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으로 그녀의 유산을 남기고 싶었다. 그림으로 남편과 자녀들에게 그녀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녀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 지를.
미술 수업은 월요일 오전 11시, 1시간 수업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린 미술 수업, 4B연필 한 자루, 지우개, 샤프 1개, 샤프심을 준비하고, A4 크기의 연습장을 준비했다.
첫 시간, 내가 그리고 싶은 남편과 나의 모습이 담긴 사진 2장을 준비했다. 1장은 베트남 하롱베이에서 찍은 하롱베이 풍경을 뒤로하고 두 사람이 나란히 예쁜 미소를 담은 사진, 또 다른 1장은 4장의 모습이 한 장에 담은 사진이었는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한 사진이었다.
그는 사진 2장을 보면서 1장을 보고 소스란 목소리 톤으로,
"베트남, 갔다 왔어요?"
왜 갈라지는 놀란 목소리일까? 일순간 궁금했다. 작년에 갔다 왔다. 그런데 왜? 이 사진을 보고서 바로 그렇게 놀라워하듯, 아니 경악하듯, 물론 낮은 톤이었지만, 왜 그런 목소리로 물어볼까? 아무튼 조금 이상하다고 여기면서 그녀는 지나갔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별나게 놀라네. 이 사람, 참, 이상하다.
왜? 그때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답지 않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의 말, 그의 행동에 마음속으로는 이상하다, 하면서도, 별다른 궁금증은 안 생겼다. 그냥, 이 사람은 그런가 보다. 아마 그녀의 관심사 밖이었는 것 같다. 그냥 미술과외 선생님, 그에게 기술만 배우면 된다, 그런 거였나? 그런 것 같다. 그의 말, 하나하나에,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문을 담지도 않았고, 분석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날씨처럼 지나갔다.
다른 1장에 담긴 여러 모습을 보면서 남편은 내 뒤에, 나는 남편보다 조금 앞에서 두 사람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라고 그는 말했다.
"남편, 인상이 좋네요."
남편은 대체로 사람들 평가에 인상이 좋다, 착해 보인다. 마음이 좋아 보인다 등 후한 칭찬을 많이 듣는다.
그는 남편의 얼굴형을 먼저 그리는 설명을 하고, 대칭점을 이야기해 준 후, 귀, 눈, 코, 입을 그리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다음에는 나의 얼굴에 대해서 "여자는 남자보다 코가 작고 코망울이 작으며." 설명을 간단히 하면서 나의 환한 웃는 입술을 그려주었다.
여기까지는 딱 좋았다. 성실한 미술 수업이었다. 그녀도 이 수업이 만족스러웠다. 인물화의 기초인 전체 윤곽을 그리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고, 귀, 눈, 코, 입 등 섬세하게 그려야 하는 기법에 대해서 그는 아주 자세히 설명을 했다. 그리고 보여주었다. 1시간 수업 동안, 그는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설명을 하면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스케치북에 데이는 손의 면이 연필심으로 인해 새까맣게 되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설명과 그의 손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다음 수업에는, 그리고 싶은 연예인 얼굴, 상반신 사진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연예인 얼굴이 윤곽이 뚜렷하니 배우기가 쉽다고 하였다. 나는 사실 내키지가 않았다. 나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얼굴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처음 배울 때는 재현을 하는 공부를 하는 거니까, 어떤 얼굴을 그려야 하나? 찾아야 했었다. 그녀는 연예인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고, 아이돌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블랙핑크의 제니만큼은 좋아했다.
제니는 현대적인 독립된 자아의 여성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많이 좋아했었다. 그녀의 메타포와 딱 맞았다. "독립된 여성, 주체적인 여성, 자기 길을 가는 여자". 제니가 멋져 보였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 안에 내재된 강인한 여성적인 자아, 그녀도 그런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여리고 가녀린 여성적인 외모 안에 숨겨져 있는 잡초 같은 생명력. 끈질긴 살아남의 생명력, 그녀에게는 강인한 내면의 힘이 있었다.
그녀의 세련된 영어 톤, 말솜씨,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와 웃음을 그녀는 좋아했었다. 제니의 노래와 춤을 따라 하기도 하고 그녀의 인터뷰를 찾아보면서 그녀의 세련된 감각을 흠모했었다. 특히 미국의 코첼라에서 보인 제니의 국제적인 세련된 감각에 탄복하였고, 매일 그녀의 영상을 즐겨서 찾아보았다. 그녀의 "ZEN", "LIKE JENNIE", "SEOUL CITY"를 좋아했다. 그러나 제니의 얼굴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 내면의 강인한 여성상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재현이 아닌, 재현을 배워야 하는 인물화 기초 시간에는 다른 인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자주 검색하는 여성 브랜드에서 마음에 꼭 드는, 분위기가 예쁘고 신비스러운 여자 모델을 찾았다. 동양적이면서도 이국적으로 보이고 몽환적으로 보이는 입술이 앵두 같은 모델이었다. 한눈에 예뻤다. 분위기가 있어 보인다. 그녀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사진을 저장해 두었다. 프린트만 하면 되는데, 수업 당일날 준비를 하지 못했다.
미술 수업 하는 날, 그는 15분가량 헐레벌떡 늦게 왔다.
"아, 죄송합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녀는 눈앞에 있는 레몬수가 담긴 크리스털 컵도 그려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 줄을 그녀 자신도 몰랐다. 그녀가 시계를 보는 그 순간에 15분이 흘러갔고, 그가 지각이구나, 수업 시간에 늦게 오는구나, 그렇게 알아차렸을 때, 마침 그가 도착했다. 항상 딱 맞는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는 그 답지는 않았지만, 그녀 또한 오랜 시간 수업을 한 내공자답게 그럴 수도 있지로 넘어갔다.
그가 물었다. 어떤 사진을 준비했냐고, 그녀는 사진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 브랜드의 모델을 그리고 싶다고 설명을 하자, 그는 노트북에 앵두 같은 입술을 한 그 모델을 찾아서 화면에 올렸다.
"베트남 여자 같기도 하고, 중국 여자 같기도 하고, 좀 오묘해요. 그런데 그녀가 참 예뻐 보여요."
"예쁘죠?"
그의 대답은 사실, 뜻밖이었다.
"젊었을 때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아요."
난데없이 그녀를 칭찬한다. 그녀는 칭찬이 싫지는 않았지만,
"아, 아니에요."
겸손의 대답을 했다.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잔을 그녀의 핸드백 옆에 두었는데, 그가 탁자 위에 올려요,라고 신경을 쓴다. 그러다가 쏟으면 가방 배려요. 그가 다정한 남자라는 게 느껴졌다. 나를 살뜰하게 챙긴다. 싫지가 않았다. 배려심이 많은 남자네. 사소한 것까지 볼 줄 아는 시선을 갖고 있다.
그는 화면을 보면서 그녀가 준비해 온 전문가 A4 크기보다는 조금 큰 스케치북에 그 모델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화면의 모델을 보고, 스케치북의 그가 그리고 있는 윤곽을 보고, 쉴 새 없이 설명을 하고, 그는 매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따금 그녀를 보면서. 그녀도 역시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모델을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는 음영과 윤곽까지 자세히 설명을 하면서 집중 있게 그렸는데, 어느새 그의 손은 시커멓게 연필심이 묻었다. 특히, 눈, 안광까지 섬세하게 터치하듯이 그리는데, 점점 살아 나오는 인물의 모습에 그녀는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그는 아주 빠르게 그렸는데, 그녀는 미대 출신답다. 영국 유학까지 갔다 온 사람이니까, 왠지 이 정도는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몰입도 있었던 수업, 어느새 -
수업이 끝났다. 끝나고 보니, 그는 데님 재킷을 입었다. 데님 바지에. 평소에는 나이키 화이트 티셔츠를 이너로 입고 바람막이 잠바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경쾌하게 보였다. 그녀는 가슴 부분에 그림이 있는 화이트 티셔츠와 데님 플레어스커트를 입었다.
"어, 선생님, 오늘 옷 바뀌셨네요. 나도 청스커트를 입었는데."
그녀는 다시 더 활기차게
"그림 그릴 때는 몰랐어요. 그림만 집중해서 봐서요. 잘 어울리시네요."
그리고 또 그녀는 그가 민망할까봐,
"뭐, 봄이잖아요."
양손을 옆으로 활짝 펼치는 제스처로 분위기를 밝게 만들면서, 환하게 웃는 그녀를 그는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밝은 얼굴로 그녀의 봄 가득한 칭찬을 듣고 있었다. 특별한 멘트를 하지는 않았다.
점점 예쁜 여자 연예인 얼굴을 그리는 데에 식상해졌다. 왜? 예쁜 여자 연예인 얼굴만 그리는 걸까? 그녀의 눈에는 다 똑같이 보였다. 동그란 눈, 예쁜 눈, 환하게 웃는 얼굴, 어깨까지 정도로 오는 머리카락, 모든 게 정형화된 틀로 보였다. 내가 그리고 싶은 인물화는 느낌, 분위기였다. 각 사람들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그 사람들만의 분위기. 개성. 그녀는 점점 인물화 그리는 것이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물었다. 도저히 못 참고서 말이다.
"왜, 예쁜 여자만 그려?"
그는 펄쩍 뛰듯이 대꾸를 한다.
"아니, 남자가 예쁜 여자를 그리지. 난 이런 질문은 또 처음 받아 보네."
그녀는 놀랐다. 왜? 그녀의 이 질문에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놀라서 펄쩍 뛸까? 그렇게 놀라서 펄쩍 뛸만한 질문인가? 충분히 물어볼만한 질문이 아닌가.
그는,
"삼촌이 아이돌 좋아하는 것과 같은 거야."
그녀는 잠시 무안해져서 그를 이해한다는 듯이, 말해주었다.
"아, 여자 연예인 얼굴이 뚜렷하니까, 그리는 게 쉬워서."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 말이 맞다는 듯이, 맞아, 그런 얼굴이었다.
"아, 뭐, 나도 노인 얼굴은 그리기 싫어."
그녀의 대답에, 그는 아주 웃긴다는 듯이, 온 얼굴을 찡그려가면서 웃는다.
그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을 내게 들켜서 그런 건가. 그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유를 장황히 설명을 했다. 어두운 노래를 많이 들었는데, 밝아지고 싶어서, 뭐, 그런 이유로 아이돌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런 설명이었다.
그가 내민 인물화 중에는, 싱가포르에서 만난 여자, 4년 동안 그려 달라고 쫓아다닌 여자, 그녀는 결혼했다고 덧붙인다. 내가 신혜선 닮았다고 하니, 진짜? 만나면 전해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었다. 아이돌도 여자 연예인도, 그가 만난 여자들도 하나 같이 눈에 쌍꺼풀이 있고, 동그랗고, 코는 오뚝하고, 입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41살이니, 몇 번 이상의 연애는 물론 해봤겠지. 그런 이야기가 별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굳이 묻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술술 하는지 그것은 좀 이상했다. 단지, 그가 그린 인물화를 관찰하는 수업인데 말이다.
"이상형이 뭐예요?"
그의 얼굴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예상 밖의 질문을 받았다는 얼굴이다. 그녀는 이 남자가 그리는 인물화의 뮤즈, 정체가 궁금했다. 그의 예술성에 대한 탐닉에 관한 질문이었다. 지적인 호기심, 그런 질문이었다.
"하나 같이 눈이 동그랗고 반짝거리고, 입은 환하게 웃고 있어요. 사람들 눈이 다 이렇게 예쁘지는 않아요."
그러자 그는 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밝은 에너지, 밝은 것을 그리고 싶었는 것 같아요. 질문을 받아 보니, 그러네요. 이상향이라고 하죠."
"이상형은 아닙니다."
이상형? 거기까지만 대답을 들었어도 그가 추구하는 뮤즈, 이상형이 대략 짐작이 되었다. 이상향? 이상형?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확실히 말했다. 이상향이라고 하죠. 이상형은 아닙니다.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는 추궁하듯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진실로 이상형은 궁금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왜? 더 묻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지금은. 지금 돌이켜보니, 물어보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다. 그때 물어볼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