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 간 나는 오디오보다는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가르치며 살아왔다. 그래서 듣는 음악의 스코어도 읽고, 하이든의 가상칠언 음반만 30장 가까이 모으며 음악에 몰두하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내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는 일종의 계시를 받았다. 무엇이 솔직해야 하냐고? 말 그대로 나는 뮤직파일이기보다는 오디오파일이 맞는 것 같다는 깨달음을 얻고 그날부터 오디오를 좋아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무슨 논리인지…)
내 전공이 디자인이다 보니 생활 속의 오브제에 남다른 애착과 집착이 있다. 그래서 나의 연구실과 공부방은 온갖 잡동사니로 차 있고, 그 물건들은 나와 대화를 하곤 한다. 보시는 분들은 신기한 게 많다며 마구 집어 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참 슬프다.
그래서 이베이와 이베이어를 좋아한다. 우리 집사람은 아예 이배희시와 살림을 차리라는 핀잔을 주곤 한다.
그런 이베이에서 잊지 못할 물건을 하나 샀다. 초기에 미국의 한 유태인 할아버지에게 — 손자가 대신하였다 —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산 적이 있었다. 무척 오래된 레어 아이템이었다. 그 카메라가 배송되었고, 뽀얀 먼지를 닦고 뚜껑을 여니 쓰지 않은 필름이 한 장 남아 있었다. 한 30년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필름.
그때도 필름이 비싸긴 마찬가지여서 아마도 중요한 때 쓰려고 남겼다가, 끝내는 기억하지 못하고 이곳 멀리까지 팔려 온 것 같다. 나는 그 필름을 부서지지 않게 곱게 꺼내서 작은 액자를 만들어 내 연구실에 걸어 놓았다. 아무 이미지도 없고 누렇게 바랜 그냥 허연 종이지만, 이 사진에는 세상 어느 작가의 사진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많은 기억이 담겨 있고 나에게는 어떤 그림보다 많은 것을 보여 준다.
이 낡디 낡은 스피커와 앰프들이 가끔은 속도 썩이고 당황스럽게도 하지만, 누군가 바라보았을 작은 진공관의 불빛과 낑낑대며 자리 옮기며 울리던 스피커들, 그리고 희끗희끗 지워져 가는 글씨와 크고 작은 때 묻은 노브들을 보면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사진처럼 과거의 알지 못할 기억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깊은 밤, 누군가가 이 오디오 앞에서 음악을 들었을 것이다. 중후한 노신사였을 수도 있고, 너무도 따뜻한 크리스마스날의 가족들이었을 수도 있다. 나도 잘 쓰다가 이 오디오를 팔면,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누군가가 사 가서 깊은 밤 다리 꼬고 심각해하며 음악 듣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