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서명

QUAD 303과 이름 없는 디자이너

by 박물지 선생

앰프의 히트싱크는 원래 뒤에 있거나 옆에 있다. 열을 방출하는 기능적 부품이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1967년에 나온 QUAD 303은 히트싱크 여덟 개를 전면에 수직으로 세워 얼굴로 내세웠다. 숨겨야 할 것을 드러내고, 기능 부품을 조형 요소로 전환한 것이다. 이건 엔지니어의 판단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결단이다.


크기와 비례도 기이하다. 303은 가로로 눕히지 않고 세로로 세웠다. 당시 앰프들이 거대한 캐비닛에 위용을 뽐내던 시절, 303은 손바닥 두 개를 나란히 놓은 정도의 작은 덩어리였다. 좁고 비좁은 런던의 주거 환경이 영국 오디오를 기형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기형이 오히려 묘한 균형을 이룬다. 크기를 줄이면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비례를 찾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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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는 더 쌩뚱맞다. 캐비닛 색은 회색이라고 하기엔 너무 탁하고, 올리브그린이라고 하기엔 너무 차갑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색. 그런데 여기에 보색에 가까운 오렌지, 정확히는 옐로우 오렌지 버튼을 얹었다. 이건 안전한 선택이 아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촌스러워지거나 산만해질 조합인데, 303에서는 기묘하게 작동한다. 누군가 이 위험을 계산하고 감수했다.


히트싱크를 얼굴로 내세우고, 기형적 비례를 균형으로 만들고, 위험한 컬러를 성공시킨 사람. 그 사람은 누구인가.


303은 발매 2년 만인 1969년에 영국 산업디자인협회(Council of Industrial Design)로부터 디자인 어워드를 받았다. 같은 제품이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영구 소장품이 되었다. 단종될 때까지 10만 대 이상이 팔렸고, BBC를 비롯한 방송국과 녹음 스튜디오에서 표준 장비로 채택되었다. 이 정도 영광이면 디자이너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모든 기록에 디자이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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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워커라는 이름은 어디에나 있다. 그는 QUAD의 창립자이자 303의 회로를 설계한 전자공학자다. '트리플' 출력단 회로, 열적 안정성, 낮은 왜곡률 — 모든 기술적 혁신은 그의 이름 아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엔지니어였지 산업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회로도를 그리는 사람과 캐비닛을 디자인하는 사람은 다르다. 히트싱크의 핀 개수를 결정하는 것은 열역학이지만, 그것을 어떤 각도로 세우고 어떤 색으로 칠 할지는 조형의 문제다.


Council of Industrial Design Award는 이름 그대로 산업 디자인 상이다. 회로에 주는 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상 기록에 디자이너 이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없다. MoMA 소장 기록에도 없다. 2003년에 출판된 QUAD의 공식 역사서 『The Closest Approach』에도 없다. 이 책은 피터 워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나왔고, 저자 켄 케슬러는 워커 본인을 직접 인터뷰했다. 215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는 회사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지만, 303을 디자인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기록이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남기지 않은 것인가?


QUAD는 순탄한 역사를 가진 회사가 아니다. 1995년에 Verity Group에 인수되었고, 1997년에 다시 중국 자본 IAG에 매각되었다. 피터 워커의 아들 로스 워커는 회사를 떠났고, 헌팅던의 공장은 매각되었으며, 생산 라인은 중국으로 이전되었다. 회사가 두 번 바뀌고 대륙을 건너는 동안 문서가 사라지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2003년의 역사서가 이 가설을 무너뜨린다. 그때는 아직 피터 워커가 살아 있었고, 원래의 직원들도 증언할 수 있었다. 책을 쓰기 위해 그들은 과거를 뒤졌다. 그러고도 디자이너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의도적 누락이라는 의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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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영국의 기업 문화에서 산업 디자이너의 지위는 지금과 달랐다. 엔지니어는 발명가였고 창업자는 영웅이었지만, 디자이너는 종종 익명의 기능인으로 취급되었다. 특히 QUAD처럼 기술 중심의 정체성을 가진 회사에서 피터 워커라는 이름은 브랜드 그 자체였다. '피터 워커의 앰프'라는 서사에 다른 이름이 끼어들 자리가 있었을까? 디자이너의 존재는 그 신화를 복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Design Council의 아카이브는 현재 브라이튼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1969년 수상 기록 어딘가에는 반드시 디자이너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찾아 공개하지 않았다. 57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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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03이 돌아왔다. IAG의 디자인 책임자 데이비드 맥닐은 새 버전의 303을 설계하면서 "원래 디자인의 아이코닉한 지위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고 말했다. 히트싱크의 개수는 8개에서 10개로 늘었지만 수직 배치는 유지되었고, 올리브그레이는 조금 더 은빛으로 바뀌었지만 오렌지 버튼은 그대로다. 맥닐은 원래의 형태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 형태를 창조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산업 디자인의 운명인가. 엔지니어는 기억되고 창업자는 신화가 되지만, 디자이너의 이름은 제품이 팔리는 순간 증발한다. 303은 57년 동안 아름다웠다. 상을 받았고, 미술관에 들어갔고, 전설이 되어 부활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동안,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형태는 남았지만 서명은 지워졌다.


QUAD 303은 산업 디자이너의 비가시성을 증언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념비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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