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Ⅱ. 기억의 앨범: 지워지지 않는 순간들
자동차 안에서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딘 끝에 도착한 해변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만 보던 새파란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과 바다가 어디서 만나는지 눈으로 구분할 수 없었다. 아무리 멀리 봐도 파란빛의 끝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엔 바다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 백사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얕은 물에 발가락만 담그고 놀았을 뿐이다. 모래성을 정성스레 쌓아 올리면 파도가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파도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깨지지 않은 예쁜 조개껍데기들을 찾아다녔고, 모래 주먹밥을 빚어 상상 속에서 요리사가 되기도 했다. 온 백사장에 내 차지였다.
어느새 혼자 노는 게 재미없어져 엄마를 향해 놀자고 외쳤지만, 엄마는 그늘 밖으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바다에 들어가면 어떤 느낌일까? 호기심이 밀려왔다.
나는 모래사장에서 놀다 말고 일어나, 바닷가로 달려갔다. 밀려오는 파도에 발끝을 담가 보았다. 그때, 내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그늘에서 쉬던 아빠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바다는 아름답지만 아주 위험해. 동해는 특히 더 그렇고.”
“동해는 왜 더 위험해?”
나는 고개를 들어 아빠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동해는 갑자기 밑바닥이 푹 꺼지는 구간이 있거든. 어디서부터 깊어지는지 알 수 없어. 파도가 갑자기 덮치면 순식간에 휩쓸려 버려. 수영을 아무리 잘하고 키가 커도 바다는 무서운 곳이야.”
아빠는 배꼽 위로는 절대 물에 들어가지 말라며 내게 신신당부했다. 아빠는 저 말을 집에 돌아갈 때까지도 수 번이나 반복했다.
경고에 겁을 먹은 나는 아빠에게 바다에 함께 들어가자고 졸랐다. 내 손보다 두 뼘은 더 큰 손을 꼭 잡고, 밀려오는 파도를 거슬러 앞으로 나아갔다. 차가운 바닷물은 처음엔 내 발목을 간질이더니, 이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아빠와 내가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가 된 듯했다.
바닷물이 어느새 내 배꼽까지 올라왔지만, 188cm의 아빠에게는 허벅지에도 미치지 못했다. 설령 내 머리까지 물이 차오른다 해도 아빠에게는 겨우 허리춤에 닿을 정도였다. 아빠는 든든한 안전장치 같았다. 용기가 생긴 나는 아빠에게 더 들어가 보자고 졸랐다. 배꼽에서 바닷물이 찰랑거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의 팔을 흔들었다.
“조금만 더, 딱 조금만 더.”
아빠는 망설이다가 이내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갑자기 물살이 거세지고 파도가 높이 쳤다. 나는 깜짝 놀라 아빠 허벅지에 두 팔을 감아 안았다. 곧바로 파도가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다시 한번 파도가 밀려오자, 나는 본능적으로 아빠의 허벅지를 감싸 안고 두 다리로는 종아리를 감았다. 마치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처럼 말이다.
그 자세는 예상 밖의 즐거움을 안겨줬다. 파도가 칠 때마다 물이 머리 위로 솟구쳤고, 나는 목만 빼꼼 내민 채 허벅지에 매달려 있었다. 어떤 파도는 입과 코로 들이쳤고, 어떤 파도는 간신히 피했다. 바닷물은 세상에서 제일 짰지만, 그마저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파도와의 스릴 넘치는 대결은 계속됐다.
아무리 바다가 위험한 곳이라 해도 나는 무섭지 않았다. 아빠의 단단한 허벅지와 내 양팔 사이에는 어떤 파도도 침범할 수 없는, 작지만 완벽한 안전지대가 형성됐다.
“아빠, 이건 이제부터 코알라 놀이라고 부를 거야!”
아빠는 별말 없이 웃기만 했다.
좀 쉬겠다며 아빠가 그늘로 들어가면 나는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고 모래 주먹밥을 만들며 놀았다. 그러다가 다시 심심해지면 아빠를 불러 바다로 들어갔다.
그날 붉은 석양이 바다를 물들일 때까지, 우리는 코알라 놀이를 몇 번이고 했다. 나는 작은 코알라였고 아빠는 거대한 유칼립투스 나무였다.
어른이 된 지금도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그날의 코알라를 떠올리곤 한다. 아빠의 다리에 짧은 팔다리로 매달려, 파도와 대결하며 깔깔거리던 아기 코알라를.
비록 그날의 기억을 사진으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사진보다도 선명한 장면들이 있다.
새파란 바다. 그리고 코알라 놀이
사진이 없어도 괜찮다. 기억에는 나이테가 없기에 시간의 흐름에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그날의 따스한 풍경은 어떤 사진보다도 또렷하게, 영원이라는 기억의 앨범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