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29,2022
아이디어 스케치나 구체적인 구상 없이 무작정 물감부터 짜고 보는 그림처럼 아무 생각 없이 때론 너무 많은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쓴다. 쓰다 보면 쓰고 싶은 이유가 있었겠거니,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겠거니 하고 일단 컴퓨터 앞에 앉는다.
흰 바탕에 일정하게 깜빡이는 검은 막대기. 그와 대조적인 나의 머릿속은 온갖 잡소리와 번민, 간혹 들을 만한 이야기로 오색찬란하다. 그 안을 헤집고 손도 못 댈 지경으로 엉켜있는 실타래에서 하나의 실을 낚아챈다. 인지하지 못했던 색과 굵기의 실이 끊이지 않고 끌려 나온다. 이따금 어딘가 걸려 힘을 더 세게 주어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법 풀려나온다. 운이 좋으면 그 끝을 말끔하게 보기도 하고 단단하게 뭉쳐 있어 멈추거나 그대로 잘라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풀어낸 실도 끝까지 뽑아낸 실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쓸모가 있다. 기다려 주기만 한다면.
그림을 그릴 때도 뿌연 안갯속에 있던 이미지를 손끝으로 데려오면 그제야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런가 하면 중간에 그리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말도 안 되게 별로인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아- 이래서 스케치를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했었어야 했는데. 에스키스도 똑바로 하고 말이야... 그랬으면 이렇게 안 됐잖아.’ 하고 미간을 좁힌다. 그저 이렇게 혹은 그렇게 작업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 뿐인데, 매번 잘 안된 쪽으로만 보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에는 되게 별로였던 그림도 독에 잘 넣어두었다가 까먹을 때 즈음 꺼내면 잘 익은 김치처럼 어라? 이런 걸 그렸었나. 꽤 괜찮은데? 싶게 맛있는 그림이 되기도 한다. 물론, 도통 익지 않거나 상해버리는 녀석도 있다.
다른 일에서도 마찬가지. 어떻게 될 것인가 대한 미래의 그림을 그려보지 않고, 다가오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잘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미리 여러 상황에 맞는 대안을 생각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진행해야지만 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역시. 하기 전까지는 모르고 여러 차례 경험이 쌓여 내공이 생긴다고 해도, 뭐- 홀짝이다. 마땅히 잘 준비된 상태는 말할 것도 없이 아주 좋지만 그 ‘잘’ 때문에 시작하지 못한다면 일단 오늘같이 물감부터 짜고 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무엇이든 해야지 잘이든 못이든 하게 되고 생각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은 결국엔 모두 ‘나’이고 알다가도 모르겠는 ‘나’라는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그리고 나머지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플러스알파. 덤이라는 사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