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50, 250-300

롤러코스터의 서막

by 한우주

하. 숫자는 정말 강하다. 우리는 9시에서 9시 하루에 두 번 정량 식사와 정량의 인슐린 주사 외에 목표혈당도 정했다. 최저는 80에서 150, 최고는 250에서 300 사이가 안전한 구간이다. 그 구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휴대폰 앱을 실행시킨 후 비쩍 마른 등 뒤에 장착해 놓은 손바닥 만한 동그란 기기를 스캔해야 한다. 그러면 실시간으로 혈당수치를 볼 수 있고(나중에 알고 보니 실시간은 아니고 약 15분 전의 수치라고 한다. ) 자동으로 앱에 기록이 된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는 병원에서도 같이 볼 수 있다. 와. 정말 편리하지 않은가 언제든 휴대폰으로 찍기만 하면 혈당을 알 수 있다니? 하지만 편리한 것은 늘 그림자가 있기 마련. 일희일비하기 딱 좋은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 앱은 너무 똑똑한 나머지 알아서 그래프도 그려주는데 그래프 위의 선이 널뛰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 심장도 같이 널을 뛴다.


덜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최대한 침착한 척하며 첫 인슐린 주사를 놓은 저녁, 장고는 세 시간 만에 40대의 저혈당을 찍었다. 다행히 병원은 야간진료도 보는지라 전화해서 묻고 되물으며 가까스로 정상 혈당 범위에 올려둘 수 있었지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이번에 400이 넘는 고혈당이다. 좀 전의 10배라니... 애는 정신을 못 차리고 힘없이 누워있고 나는 큰일이 나서 또 병원에 전화한다. 주사를 놓는다. 두 시간 뒤 50대의 저혈당을 찍는다. 이번에는 병원에 전화하지 않고 안내받은 대로 올리고당 5ml를 먹인다. 한 시간 뒤 수치가 조금 올라오는 듯싶더니 도로 저혈당. 다시 올리고당. 도로 저혈당. 저혈당의 붉은 늪에 빠져 혼비백산으로 병원에 다시 전화한다. 같이 앱에 기록된 혈당 수치를 보겠다던 주치의는 내일모레까지 휴진. 다른 의사와의 통화를 위한 기다림 그리고 상담 끝에 용량을 줄이자 한다. 어느새 하루가 또 지났다. 그렇게 주사를 놓으면 저혈당을, 다음 주사시간이 오면 고혈당을 치는 롤러코스터 같은 전혀 재미없는 나흘이 지났다. 그 사이 인슐린 용량은 2칸에서 1.5칸, 1칸 이윽고 0.5칸까지 내려갔고, 병원에는 이제 전화만 하면 친절하지만 차게 식은 '아. 장고보호자님.' 하는 소리를 자동응답기처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브이아이피 인가 브을랙리스트인가. 병원에 전화하는 것이 괜스레 불편해진다. 그러면 이때부턴 초등학교 때부터 다져온 검색 실력을 발휘할 차례. 온갖 카페에 가입하고 수의사학회지, 논문까지 뒤져본다. 뭔가 이제 알 것도 같은데. 장고의 등을 스캔하니 LO라는 처음 보는 숫자, 아니 문자가 보인다. 그렇게 두 시간을 혈당을 알려주는 앱에는 붉은색 경고등과 같은 LO만 뜨고, 저혈로 인한 임상증상이 딱히 보이지 않는 이 녀석은 아는지 모르는지 단잠에 빠져있다. 뭐지. 이거 믿을만한 기기인가... 검색 실력이고 뭐고 다시 냅다. 전화 걸기- 그 사이 연속혈당 측정기 싸브레 아니 리브레는 고장이 나버렸다. 재빨리 내일 도착하는 혈당기를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병원을 예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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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은 더 이상 스캔해서 볼 숫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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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할 일이 사라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는 척 오늘은 잠에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숫자 지옥에서 일단은 잠시 탈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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