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읽다가 포기한 소설
내가 이 영화를 관람했을 때는 아무래도 고등학교 재학 시절이었던 것 같다. 검색한 결과 한국에서의 첫 개봉은 1968년 12월 22일이고 두 번째 개봉이 1978년 1월 1일인데 첫 개봉 때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반공"이 국시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으니 영화의 배경이 되는 소련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생소한 나라였다. 그러나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광활한 소련의 설원지대 모습은 참으로 신비로웠고 아름다웠다.
영화에서 느꼈던 감동은 원작 소설을 읽 동기가 되었다. 당시 제목은 '의사 지바고'였으며 시인 김광섭 번역으로 동아출판사에서 1,2권으로 출간되었다. 현재 절판되어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두꺼웠던 책은 결국 1/3 정도 읽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놈의 러시아 이름 때문에 하두 헷갈렸던 것이다. 아래의 인물 관계도를 보면 내가 포기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소련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1890-1960년 향년 79)가 쓴 이 소설은 실제 출간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모스크바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교수인 부친과 사업가 집안의 딸인 모친을 두었고 어린 시절부터 군사 아카데미의 기숙학교에 다니며 다른 귀족 자제들과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 공부를 위해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진학했고 그 후에는 철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부모는 저명한 소설가 톨스토이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자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문학적인 기질을 살릴 수 있는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그의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0년 20세가 된 그는 나이가 같은 그의 사촌 올가 프레이덴베르크에게 사랑을 느꼈으나 결혼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40년 동안이나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평생 동안 가까운 우정으로 발전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이 주도하는 혁명이 발생하고 다른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두 떠나갔지만 그는 러시아를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고 내내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글을 출판하고자 했지만 당시의 식량과 연료의 부족 등으로 끔찍한 상황에서 오히려 소장하고 있던 책을 팔아 빵을 구해야만 했다.
어려운 가운데 그의 세 번째 시집 <나의 여동생, 인생 My Sister, Life>이 1922년 출간되어 크게 호응을 받고 파스퇴르나크는 단숨에 러시아 젊은 시인들의 우상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이 해에 미술을 전공하던 학생 예브게니야 루례(Evgeniya Lurye, Евгения Лурье)와 결혼하고 이듬해 아들 예브게니가 태어났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소련의 문단에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나 그는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야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공로로 스탈린에게 호감을 주어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닥터 지바고>의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1946년 노비 미르(Novy Mir) 출판사의 편집국에 근무하던 에 올가 이빈스카야(Olga Ivinskaya)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보리스 파스퇴르나크는 그녀와 연애를 했을 뿐 아내의 곁을 떠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훗날 그는 이빈스카야가 <닥터 지바고>의 라라에 투영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소설에서 유리 지바고의 많은 시들은 파스퇴르나크가 이빈스카야에게 쓴 것이었다.
1949년 소련 당국은 파스퇴르나크에게 소련 체제에 비판적인 글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이빈스카야는 파스퇴르나크와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5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투옥 당시 그녀는 파스퇴르나크의 아이를 임신 중에 있었지만 감옥에서 유산하고 말았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닥터 지바고>의 집필도 끝났으며 이빈스카야도 감옥에서 나왔다. 파스퇴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의 원고를 노비 미르 출판사에 넘겼지만 반정부 소설로 간주되어 출판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1956년 3월, 이탈리아 공산당은 세르히오 단젤로(Sergio D'Angelo)라는 기자를 소련에 파견했고, 이 기자는 이탈리아 공산당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러시아 문단에 접근할 수 있었다. 지바고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밀라노의 한 출판사에 출판을 제안했다.
파스퇴르나크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시의 소련 작가들 중에 어느 누구도 서방출판사와 거래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출판사 책임자 펠트리넬리(Feltrinelli)가 출판을 결심한 사실이 알려지자 소련 당국은 사절단을 보내 출판 취소, 연기를 요구했다.
펠트리넬리가 사절단의 요구를 거절하자 이번에는 파스퇴르나크에게 압박을 가해 출판사에 원고를 철회한다는 전보를 보내도록 강요받았으나 그는 오히려 비밀스럽게 펠트리넬리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이 보내는 전보를 무시하라고 했다.
(펠트리넬리는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제명당했고 1972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마침내 1957년 11월 <닥터 지바고>가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출간되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1958년 10월 23일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알려졌지만 10월 25일 모스크바의 문학 연구소는 모든 학생들에게 파스퇴르나크와 그의 소설을 비난하는 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 당국은 만약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그가 모스크바를 떠난다면 재입국이 거부될 것이라는 통보를 했다. 그 결과 파스퇴르나크는 노벨 위원회에 전보를 보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주는 상의 의미를 고려할 때,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과도한 차별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 자발적인 포기를 놓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노벨 위원회는 노벨상 수여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가 수상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작가 연합은 파스퇴르나크에 대한 악마화를 멈추지 않았고 추방해야 한다는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이에 파스퇴르나크는 흐루쇼프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게 미국으로 떠나라는 추방령이 내려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저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저의 삶 모든 것이 러시아에 있습니다. 제가 러시아 밖에서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저의 실수가 무엇이었든 간에, 현재 서구에서 저의 이름을 이용하여 정치적 선동을 하고 있는 사실은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이미 노벨상 수상을 포기했고 이 사실을 직접 스웨덴 아카데미에 알렸습니다. 제가 조국의 국경을 넘는 것은 저에게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저에게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기를 요청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저는 소련 문학을 위해 뭔가를 해냈고, 지금도 여전히 쓸모가 있는 사람입니다.”
파스퇴르나크의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1958년 10월 31일, 소련 작가 연합은 비공개 재판을 개최하여 파스퇴르나크의 소련 시민권을 박탈하고 '자본주의의 천국'으로 추방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당국에 제출했다.
갈수록 건강이 악화된 보리스 파스퇴르나크는 1960년 5월 30일 저녁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인은 폐암이었다. 그의 죽음이 전혀 공지되지 않았지만 모스크바 지하철에는 그의 장례 날짜와 시간이 적힌 손글씨 안내문이 곳곳에 퍼졌다.
그 결과 KGB의 엄격한 감시를 뚫고 수천 명의 팬들이 모스크바 교외 페르델키노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작가촌 공동묘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했다.
1988년 노비 미르 출판사는 <닥터 지바고>를 정식 출판했고, 파스퇴르나크의 노벨상 메달은 1989년 그의 아들 예브게니 보리소비치 파스테르나크가 스톡홀름을 방문하여 수상했다. 2003년 이후 러시아의 학교 교육 과정에 <닥터 지바고>가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