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아이덴티티>의 숨겨진 이야기

1. 제이슨 본의 탄생

by 발길 가는대로

1980년 출간된 소설 <본 아이덴티티, The Bounne Identity>는 미국의 첩보물 전문 작가 로버트 러들럼(Robert Ludlum 1927-2001년 향년 73세)의 9 번째 작품이자 가장 출세작이다. (그의 스릴러 소설은 모두 27권이다)

소설 표지.png 초판본 표지

해병대 복역을 마친 그는 뉴욕의 뉴저지에서 연극배우이자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연극무대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가 집필하는 소설에서 대중이 원하는 열망이 무엇인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극의 관객이 다음 장면에 기대하듯이 서스펜스 또한 동일하다. 예측하지 못한 다음 일에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2001년 2월 10일, 플로리다 주 나폴리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의문의 화재 사고가 발생했고 심각한 화상에서 회복하는 치료를 받던 중 3월 12일 심장마비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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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첫 소설 <스카를라티의 유산>을 출간한 직후 그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12시간 동안 원인 불명의 일시적인 기억 상실증을 겪었고 이는 결국 <본 아이덴티티>의 주인공 제이슨 본에게 투영되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캐릭터를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영화와 달리 소설 <본 아이덴티티>에 등장하는 악인은 실존 인물 카를로스 재칼(Ilich Ramírez Sánchez)이다. 당시 가장 악명 높은 국제적인 테러리스트였던 재칼의 존재는 제이슨 본의 숙적이 되어 대결하고 있다.


그는 소설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광범위한 자료를 검토하고 언론에 나왔던 재칼의 활동 장소를 직접 여행하면서 장소의 사진, 티켓, 메뉴판, 브로슈어 등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여 소설 속 배경 묘사에 활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또한 연극배우와 제작 경험에서 자신이 느끼고 있던 관객(독자)들이 요구하는 빠른 전개를 통해 빈번한 장소와 시점의 변화, 예상하지 못하는 반전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독자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개 방식에다 정부 기관의 비밀 작전, 국제 테러리즘의 배후 등에 관한 음모론을 함께 등장시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 재칼이라는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다.


1980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1994년 이미 체포된 실존 인물 재칼이라는 존개가 더 이상 신비로운 인물이 아니었고, 2002년 개봉된 영화는 이미 냉전이 종식된 상황에서 냉전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 재칼이라는 존재는 세계관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가 탄생시킨 영화 속의 '제이슨 본'이라는 존재는 익히 알고 있던 첩보물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우선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 혹은 악의 조직을 분쇄하는 ‘정의로운 미국 정보기관 CIA’가 아니라 오히려 선한 주인공을 추적하며 괴롭히는 나쁜 조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CIA(미국 중앙정보국 Central Intelligence Agency)가 조직이 가진 거대한 힘으로 미국 혹은 세계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때로는, 얼마든지 불법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란 콘트라 사건’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한 이야기지만…


1986년 10월 5일, 미국산 무기를 가득 실은 미국 민간 항공기 1대가 중남미 국가 니카라과 상공에서 정부군의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어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진상에 관해 미국 언론이 설왕설래하며 헤매고 있을 때 1986년 11월 3일 레바논의 잡지 (Ash-Shiraa)가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유진 하센푸스는 CIA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는 보도를 함으로써 미국과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히는 스캔들로 비화했다.


비행기에 실려 있던 미국산 무기들은 니카라과 우익 반군 콘트라를 지원하던 무기였는데 이는 미 의회의 승인도 없었던 내용이기 때문에 당시의 미국 레이건 정부에서도 내 몰라라 하는 상황이었다.


사건의 진상이 점차 드러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반군을 지원하던 무기의 자금 출처는 당시 미국이 적대시하던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에 무기를 판매하고 남은 CIA의 비자금이었던 것이다.


즉, 미국은 이란의 지원을 받던 시아파 무장 조직 헤즈블라에 의해 인질로 잡혀 있던 미 대사관 직원들의 구출 조건으로 이란에 미국산 무기를 몰래 판매하는 비밀 협정을 맺었던 것이다.


CIA는 이때 엄청난 폭리를 취해 그 이익금으로 니카라과 우익 반군 소모사 세력의 콘트라에게 무기를 공급했던 것이다. 또한 CIA는 반군 세력들이 무기 구입 대금으로 마련하기 위한 코카인 판매까지 알선하는 등의 폭리를 취해 CIA의 비밀 자금으로 운용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영화의 도입 부분은 소설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러들럼은 시나리오 작업 초기에 고문으로 참여하다가 영화 개봉 1년 전에 사망했다.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어선에 의해 구출된 한 청년이 기억을 잃었지만 자신의 엉덩이에 있던 필름에서 발견한 스위스 은행 계좌 번호를 추적하여 취리히에 갔다가 다시 자신의 거주지 파리까지 가서 한 여인을 만난다는 내용까지가 소설과 영화가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후 CIA에 쫓기는 제이슨 본(Jason Bourne)의 이야기는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소설의 내용과 달리 토니 길로이와 브레이크 헤른에 의해 각색되어 소설의 내용과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주인공 제이슨 본이 일시적인 기억 장애를 겪는 것은 작자 자신이 겪었던 12시간의 기억 상실증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 Bourne은 19세기(1887년)의 유명한 심리학 사건 주인공 Ansel Bourne이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 ‘A. J. Brown’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3개월 동안 살았던 사건 기록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즉,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펜실베이니아에서 살았지만 3개월 후 깨어났을 때 Ansel Bourne이라는 원래의 자신을 기억했지만 브라운이라는 이름의 삶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CIA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내용은 이 영화를 감독한 더그 라이먼(Doug Liman)의 출생과도 관련이 깊다. 바로 그의 부친 아서 라이먼이 국가안보국(NSA) 출신이며 위에 언급한 이란-콘트라 사건의 수사 담당이었던 것이다.

더그 라이먼.jpg 더그 라이먼 감독 2010년

더그 라이먼은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을 영화화하고 싶었던 열망을 실현하고자 제작사 워너 브라더스에 접촉하여 판권을 확보하고 토니 길로이와 함께 각본 구성에 참여했다.


라이만은 맷 데이먼 Matt Damom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기 전에 브래드 피트, 러셀 크로우, 아놀드 슈워제네거, 톰 크루즈, 실베스터 스탤론 등의 많은 배우들에게서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주인공을 맡았던 맷 데이먼의 경우 가장 장애가 되었던 요소는 그가 전혀 액션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임스 본드처럼 점잖은 첩보원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Matt_Damon_2001.jpg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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