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출생과 성장
로렌스가 죽을 때까지 타고 다녔던 마지막 모터사이클 George VII(GW 2275) Brough Superior 모델은 버나드 쇼가 1932년에 185파운드(현재 가치 약 12,000파운드)를 주고 구입하여 선물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영국인들의 1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로렌스는 생전에 모두 8대의 브로 슈페리어를 차례로 구입했었다. 하지만 그가 탔던 모터사이클은 7번째 브로 슈페리어였다. 8번째는 주문 중에 있었던 것이다.
브로 슈페리어는 1919년부터 1940년까지 영국 노팅엄에서 생산되던 주문형 모터사이클이었다. 당시에는 “모터사이클의 롤스로이스”라고 했으며 실제로 롤스로이스 가격과 비슷했다.
모두 19개 모델 3,048대가 생산되어 현재 약 1/3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이를 구입하려면 최소한 6억 원은 각오해야 한다.
아래 사진은 1929년식 'George VI'(등록번호 UL 656)를 조지 브로(George Brough, 모터사이클 제작자, 오른쪽에 제복을 입고 앉아 있는 인물)에게서 건네받는 순간을 그의 친구 할스워스(Hallsworth)가 촬영한 몇 장의 사진 중 하나이다. (6번째 모터사이클)
당시 로렌스는 영국 공군에 '토머스 에드워드 쇼(Thomas Edward Shaw)'라는 가명으로 사병으로 재입대했으며, 이 사진은 그가 근무 중이던 시기에 군복 차림에 부츠를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을 당해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이다.
로렌스가 죽은 후 2년 뒤 1937년, < T.E. Lawrence By His Friends>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로렌스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회고록을 모은 글이었다. 여기에도 버나드 쇼의 기고문이 있다.
“ Lawrence had a passion for digging up old civilizations, to gratify which he had to go to the East, where such excavations are not obstructed by precarious and extremely uninteresting new civilizations. He picked up some Arabic, and found out the sort of people the Arabs are. Knowing already only too well the sort of people we are, he saw that if he came to our rescue by making the Arabs revolt during the War he would have more trouble with us than with them; for British public opinion and official routine disapproves intensely of geniuses, even when they have been hallmarked at Oxford. As to the British Army, its feelings when, after having to make Lawrence a colonel rather than be ordered about by a nobody, it found him leading his hosts to battle on camel-back in a picturesque Arab costume, can be more easily imagined in messrooms than described by me. Even the camel did not get its regulation meals.”
"로렌스는 오래된 문명을 파헤치고, 불안정하고 극도로 흥미롭지 않은 새로운 문명으로 인해 발굴에 방해받지 않는 동양으로 가서 만족해야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랍어를 배워가며 아랍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아랍인들을 반란을 일으켜 우리를 구하러 오면 그들보다 우리와 더 많은 문제를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영국 여론과 공식적인 일상은 옥스퍼드에서 천재성을 강력하게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로렌스를 아무도 명령하지 않고 대령으로 만들어야 했던 영국군에 관해서는 그림 같은 아랍 의상을 입고 낙타를 타고 전투를 벌이게 된 그의 기분을 제가 묘사한 것보다 혼란스러운 방에서 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낙타를 타고 있었지만 낙타조차도 이를 쉽게 규정할 수 없게 만듭니다."
Thomas Edward Lawrence(1888년 8월 16일~1935년 5월 19일, 46세)는 영국의 육군 대령으로 제대했다가 영국 왕립 공군의 일병으로 생애를 마쳤다.
웨일스의 시골 마을 트리머독(Tremadog)에서 출생한 그는 귀족 집안 출신의 아일랜드계 부친과 로렌스 집안의 하녀였던 모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의 모친은 스코틀랜드에서 부친과 싸운 후 야반도주한 교사 출신이었다.
1879년, 18세의 사라 로렌스(로렌스의 모친)는 네 딸의 가정교사로 일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호화로운 저택 토마스 채프먼(Thomas Chapman) 경의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곧장 불륜으로 이어졌고 채프먼은 아내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며 로렌스라는 성을 채택했다. 사실 T.E 로렌스는 자신의 이러한 출생의 내막을 1919년 부친 채프먼이 사망한 후에야 알았다고 한다.
로렌스는 15살이 되던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친구들과 함께 버크셔, 버킹엄셔, 옥스포드셔 등의 지방 마을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교회, 기념비, 유물 등을 연구하는데 취미를 가졌다.
1905년 18세가 된 로렌스는 왕립 포병대에서 몇 주간 소년병으로 근무를 마친 후 1906년, 1907년 여름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여행을 하며 중세의 고성을 탐구하고 관련 사진과 그림 등을 수집하기도 했다
1907년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한 그는 Jesus College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재학 중에 있던 1908년 여름 두 달 동안 프랑스를 거쳐 지중해 연안까지 3,500km 거리를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프랑스의 중세 고성을 연구했다. 여행 중에 그는 총을 맞고 강도를 만나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910년, 대학을 졸업한 로렌스는 대영박물관을 대신하여 D.G. 호가스(D. G. Hogarth)가 주동이 된 탐험팀에 소속되어 실무적인 고고학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사실 호가스는 박물관장 신분이었지만 대영 제국의 중동 전략 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호가스의 뒤에는 해군 장관 처칠이 있었고, 처칠은 아랍의 산업적, 군사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연간 100파운드의 장학금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로렌스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가서 아랍어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후 시리아 북부 제라블루스 인근 카르케미쉬(Carchemish)에서 발굴 작업을 수행하며 1914년까지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영원한 친구 거트루드 벨(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 여사를 만나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1909년 찍은 거트루드 벨의 모습이다.
1914년 1월, 영국군은 대영박물관 소속의 울리(Leonard Woolley)와 로렌스를 네게브 사막에 조사를 위해 고고학 연구라는 위장 수법으로 파견했다. 아래 사진에서 좌측이 울리, 우측이 로렌스이다.
네게브 사막은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이집트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연구는 이곳의 고고학적 가치보다 상수원의 위치 등과 같은 군사적 관련성에 주의를 기울였다.
1914년 10월, 로렌스는 카르케미쉬(Carchemish)의 멘토였던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호가스 (David Hogarth) 중령에게 호출을 받아 이집트 카이로의 아랍국 정보부대로 파견되어 12월 15일 카이로에 도착했다.
당시 로렌스는 소위로 임관받은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계급에 걸맞은 군사훈련도 받지 않은 군인이었다. 그는 카이로에서 2년 정도 근무를 했었다.
이 기간 중에 프랑스에서 복무하던 두 동생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동생들의 죽음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동생들에 비해 자신이 비교적 안전한 아랍국의 정보부대 사무실에 근무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로렌스가 소속한 영국군 아랍국의 사령관은 길버트 클레이튼( Gilbert Clayton) 준장이었으며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이 이집트 고등판무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훗날 맥마흔은 외무장관 재직 시절 맥마흔 선언을 했다)
아래 사진은 1922년 길버트 클레이튼이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들과 찍은 모습이다. 뒷줄 좌측에서 4번째 군복 차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15년이 되자 아랍의 상황은 복잡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복무하던 많은 아랍인들이 아랍어를 사용하는 오스만 영토 내의 여러 곳에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증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은 아랍의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메카의 에미르 샤리프 후세인(Sharif Hussein , Hussein bin Ali al-Hashimi, 당시 48세)과 접촉했다. 아래 사진은 1917년 당시의 모습이다.
이들의 목적은 오스만 제국에 소속된 아랍인들과 기타 지역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랍의 부족들을 응집시키고 선동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후세인 왕은 샤리프 중의 샤리프였다. 아라비아 사막의 최대 실력자였고 예언자의 직계 후손인 메카의 전통적인 군벌 하심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랍권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다.
후세인 왕은 네 아들을 중심으로 권력이 편성되어 있었다. 로렌스의 임무 중에는 후세인 왕의 네 아들 알리, 압둘라, 파이잘, 자이드 중에서 어떤 아들이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것인지 또는 어떤 아들이 영국에게 가장 유용하게 작용할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샤리프 후세인은 영국의 이러한 제안에 동의하는 대신 그 대가로 헤자즈(Hejaz), 시리아(Syria)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역을 포함하여 독립된 아랍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영국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후세인의 제안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항이었다. 우선 시리아의 경우 프랑스에서 자신들의 식민지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인도 정부는 메소포타미아의 곡창이 인도의 식량으로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5년 영국을 대표하던 외교관 맥마흔은 샤리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이집트에서 페르시아까지 모두 아랍국으로 인정해 주겠다. 단, 현재 영국이 점령하고 있는 쿠웨이트, 그리고 시리아의 해안 지역(예루살렘을 포함)은 영국이 계속 지배하는 조건이다.”
샤리프 후세인은 그의 둘째 아들 압둘라의 조언을 받아 아라비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전체를 하심 제국으로 선포하고 아랍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비밀 세력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봉기는 불과 수천 명에 달하는 미미한 병력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아래 사진은 1914년 후세인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다.
최대 10만 명의 아랍 봉기를 기대하고 있던 영국 정보부의 수장 키치니 원수는 카이로에 있는 아랍국의 헨리 맥마흔에게 아랍의 전사들을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를 수배하여 후세인 반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헨리 맥마흔은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아랍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28세의 로렌스가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로렌스는 여전히 울리와 함께 카르케미쉬(Carchemish)에서 유물 발굴 등의 고고학 연구에 열중하고 있던 중이었다.
사진의 중앙이 로렌스, 우측이 울리이다. 힛타이테(Hittite) 석판을 발굴한 모습이다.
문제는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과의 약속을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