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패왕별희> 신구의 대립
어느덧 중국 대륙의 주인은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의 초기 정책은 인민과 함께하는 기존의 질서, 문화, 관습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전통 경극 역시 인민과 함께 숨을 쉬는 존귀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신 정권의 지도자 저우은라이 총리가 직접 메이란팡을 베이징으로 모시고 또 그를 위해 경극 전용 무대까지 마련해 주면서 여러 차례 경극단을 방문하여 격려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은 자신의 권력이 유지되기 어렵게 되자 무고한 인민들에게 처절한 투쟁을 명령했다. 바로 1965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공식 명칭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으로 불린 이 민중 운동의 혁명 주체 세력이 내세운 표면적인 구실은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에 방해가 되는 전근대적인 문화를 몰아내고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다.
본래 개혁을 하자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파괴였다. 왜냐하면 투쟁의 본질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처럼 떠받들던 소련의 스탈린이 실각당하고 그에 대한 격하운동은 마오쩌둥 자신을 향하는 것이었고 그를 옹호하던 친위세력 4인방에게 가해지는 공포였던 것이다.
순식간에 구체제와 구문화의 상징이 되어버린 청톄이와 샬로는 자신들이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버리고 '혁명 모법극'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톄이는 이를 정신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 본래 사내아이로서, 계집아이도 아닌데..."라는 우희의 대사 속에 그의 정신세계는 손가락이 잘리고 입안에 들어온 뜨거운 담뱃대로 인하여 사회적 거세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들과 같은 제자에게도 '1분 1초도 떨어지면 한평생이 아닌 것'이 되는 샬로에게도 버림과 배신을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청톄이의 의식 속에는 오직 이 한 마디 "패왕의 검은 이런 훌륭한 검이었을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패왕이고 넌 왕비가 될 수 있었을 텐데"만 기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품 안에 들고 있는 '검'은 운명이고 죽음을 안고 있었다. 우희의 죽음도 패왕의 죽음도 모두 이 검에 의해 죽었던 것이다.
경극 속의 우희와 현실 사이에서 살고 있던 청톄이의 의식 세계는 군벌 - 일본군 - 국민당 - 공산당으로 급변하는 사회체제와 함께 어떤 것이 진짜인지 모르는 모호한 환각의 세계였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였지만 정작 현실 속의 영화 <패왕별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공산당 당국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자신들의 추악한 장면을 모두 가위질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몸은 사내아이로서..." 시작된 두지에게 가해지는 체벌 장면과 서로 몸을 씻겨주는 장면, "1분 1초라도 떨어지면 한평생이 아니잖아"라고 애원하는 장면, 주샨과 결혼을 선언하고 떠나는 샬로에게 "가지 말라"라고 매달리는 장면, 청톄지가 아편에 취한 장면, 탁한 어항이 교체되는 장면, 그리고 청톄지와 제자 샤오쓰가 경극관을 두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장면 등이 모두 삭제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영화의 흐름상 가장 중요하고 미묘한 감정의 대립 장면이 삭제된 영화 <패왕별희>는 죽은 시체가 다름없을 정도이지만 - 사실 한국에서도 초기 개봉할 때 동성애 장면, 아편을 흡입하는 장 등은 삭제된 체로 방영되었다.
영화 속 두 명의 우희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 현실을 일깨워주는 샬로의 한 마디 "너 미쳤구나, 그건 경극 속 얘기"라는 말을 들어도 믿을 수 없는 현실... 이는 우희가 초패왕의 검에 몸을 맡기듯 청톄이의 죽음도 예견되는 삶이었다.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청톄이를 강간하고 놀잇감으로 삼았던 원대인은 문화혁명의 인민재판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고 사형에 처해진다.
원대인의 실제 모델이었던 원극문은 그의 부친 원세개가 실각하자 상하이로 도망쳐 그곳의 폭력집단 청방에 가입했지만 공산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죽었다. 청방 세력은 공산 정권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하여 훗날 삼합회의 일원이 되었다.
청톄이의 제자이자 자식이었던 샤오쓰도 결국 동료들에게 끌려가 탄압을 받는다. 문화혁명 당시 금지된 경극에 출연한 그를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은 중국 내 개봉판에서 정톄이의 자살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두 사람이 함께 공연하는 장면에서 페이듯 아웃되며 끝난다.
우희 역을 맡은 장국영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그는 영화의 대사를 익히기 위해 베이징 표준화를 익혀야 했을 뿐 아니라 경극의 동작까지 익혀야 했던 것이다.
이 모두를 지도한 사람은 당시 중국의 경극 스타 장만링(张曼玲 장만령)과 그녀의 남편 스이엔씅(史燕生 사연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