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주변의 분위기를 잘 신경 쓰고 눈치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스트레스였는지 지난 일주일간 집중이 잘 안 돼서 괜히 유튜브나 보고 책을 넘겨도 많이 넘어가지 못했다. 어제도 결국 낮에 자다가 깨서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나서 세시에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서울예술대학과 계원예술대학의 학생들이 함께 한 권의 책을 만드는 프로젝트의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날이었고 약간 지각할 것 같아서 명동역부터 막 뛰어서 겨우겨우 도착했다. 나는 여름부터 계원예대에 특강을 시작, 두 팀의 멘토링을 했었기에, 행사장에 도착하니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도착해서 물 세잔 마시고 뒤에 서있다가 학생들의 프레젠테이션 시간에 잘 보고 싶어서 안경 쓰고 맨 앞줄로 갔다. 작년과는 사뭇 분위기가 더 정리가 잘되어진 더미북 전시부스와 간결한 3분 프레젠테이션, 짧은 시간 안에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서로 협력하려는 학생들의 분위기가 참 좋았다.
이 두 학교의 큰 행사를 계획하시고 그림책 평론가이자 번역가, 서울예술대학 교수님이신 항상 따스한 모나리자 미소를 머금고 계신 김지은 교수님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아티스트 토크로 시간 내주셨던 백희나 작가님을 비롯 많은 작가님들과 편집자님들이 자리를 함께 해주어서 이 행사가 얼마나 실질적으로 그림책 출판계에 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지 느껴졌다.
다른 팀의 이야기도 처음 보았는데, 작화가 우수한 작업들도 보였고 [기계기]라는 독특한 인간의 한 시기를 할머니의 유품인 선풍기에 빗대어 표현한 특이한 그림책이 흥미로웠다. 그리는 사람과 꼭 닮아 있는 강아지 캐릭터와 3분 안에 효과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어떻게 해야 전체적인 줄거리가 인식될 수 있는지 좋은 사례도 보였다. 다들 준비를 많이 한 게 티가 많이 나서 박수가 계속 나왔다.
아무래도 내가 멘토링한 두 팀에 마음이 기울어서 더 집중해서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한 팀은 최종 제작본의 일정이 맞지 않아 중간과정 더미북을 전시해야 했다. 핸드폰과 미디어에 중독된 현시대에 아이가 핸드폰을 내려두고 민달팽이와 매미껍질, 길에서 주은 여러 기억조각들을 가지고 엄마의 공방에 도착해 처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마지막 장면이 아름다웠다. 시대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글과 그림 몇 줄 몇 장으로 표현한다는 게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기에 매끄럽게 연출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난해한 추상 작업 같았던 이미지도 연결된 그림책으로 마지막에는 잘 정리가 되었다. 많은 발전이 있어서 더 이 작업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두 번째 멘토링팀의 이야기는 [똑똑똑, 대나무 숲]이라는 대나무가 엄청 자라는 작은 별에서 혼자 사는 외로운 카피바라가 주인공인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글이 너무 많아서 이 글이 그림책으로 잘 보이지 않았는데 3번의 만남동안 글을 함께 많이 줄이고 다음었다. 최종 프레젠테이션에서 나는 잠시 이 이야기에 울컥했다.
고독한 카피바라는 혼자서 어린 왕자가 살 것 같은 작은 별에 산다. 바오바브나무 같이 그 별에서는 대나무가 무서운 속도로 자란다. 카피바라는 혼자 사는 이 별에서 외로움을 느끼지만 대나무를 매일 관리하며 죽순을 섞어서 자신만의 쿠키레시피를 만들어 낸다. 그러다 처음 찾아온 개구리 우체부에게 쿠키를 처음으로 나눠주며 둘은 잠시 시간을 나누게 된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개구리에게 쿠키를 조금 싸주기도 했고. 개구리는 전우주를 돌아야 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카피바라가 보고 싶어도 자주 올 수 없다. 카피바라도 그런 사정을 알기 때문에 마냥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늘 자기가 하던 대로 대나무를 뽑고 쿠키를 굽는 것을 계속한다. 대나무 쿠키의 향긋한 향이 퍼져나가고 옆 별에서 궁금해서, 또 개구리가 아껴먹으며 나누어준 쿠키를 먹고 그 맛을 잊지 못해서 카피바라의 별로 찾아오는 새로운 친구들, 오래전 떠났다가 돌아온 친구들도 있다. 그들도 잠시동안의 시간일 뿐이지만 카피바라와 함께 쿠키를 나누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간다.
'오래오래 여기서 살았는데, 이런 날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장으로 그림책은 끝이 난다.
엄청 큰 배낭 메고 뒷자리에서 물 마시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김지은 교수님께서 나보고 어디 급하게 가시냐고? 할 말 없냐고 부르셔서 앞에 나가서 갑자기 모두에게 이야기를 하게 돼서 당황했다. 두서없이 이야기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은 기억은 안 난다.
우리가 가끔 누군가를 만나서 아주 잠깐 이전과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 그리고 헤어지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기억하면서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카피바라의 평화로운 정서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모인 이 행사가 그런 시간 중에 하나라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20대의 대학시절에 이런 멋진 프로젝트가 있었다는 것, 그때 함께 글과 그림을 그렸던 친구와의 운명적인 만남. 이런 것이 나이가 들어서 돌아보면 어떻게 기억될까? 지금 체감하고 있는 것보다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멋진 기회인지를 그때 더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멋진 행사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 참 행복하고 감사하고 기쁘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시 물먹으로 가는데 조금 눈물이 났다.
저녁 먹으려고 둥그렇게 모인 작가님들과 편집자님들 모임에서 28개월 아기엄마이자 스토리보울의 편집자분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린 둘 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팬이었기에 그 명대사, 그 명대사 하면서 카피바라와 조제가 느꼈을 감정의 유사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노란 상상 최현경 부장님과도 함께였는데, 우리에게 술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길 지나가다가 임신하신 분들이나 아기 엄마들만 봐도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이유 같은 찐 아줌마들의 대화를 하다가 또 조금 눈물이 났다. 왜 애기 엄마들은 다 안쓰러운지, 다 도와주고 싶은지. 그런 감정에는 묻고 따질 이유가 전혀 없다. 나는 목요일에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한 예비 엄마에게 몇 권의 시집 세트를 선물했다. (나는 시에 대해 잘 모르기에 절대 사주지 않는 분야의 선물인데, 그분이 지나가는 말로 그 시집이 갖고 싶다고 며칠 전에 실물 책을 보고 만졌기 때문이다. 부담되지 않고 기쁨이 되었기를.) 내가 처음 그림책을 공부를 시작할 때, 무언지 전혀 모르고 감을 잡고 싶어서 그림책 전집 100권을 충동적으로 사서 모으고 일러스트 잡지를 구독하기 시작하던 20대 중반의 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책들은 여전히 우리 집 책장에 잘 있고 하늘이 바다가 읽고 있다.) 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안개같이 잘 잡히지 않는 단계에서 가장 빠른 해결책은 사실 많이 보고 이 분야를 많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백희나 작가님과 이 행사덕에 일 년에 한 번씩 한 테이블에 앉는 영광을 누리는데 참지 못하고 엉망으로 사진 한 장 찍었다. 밥 먹는데 죄송합니다. ㅠㅠ
헤어지면서 학생 몇몇이 내 한겨레 수업을 들으러 오겠다고 했다. 그래, 와라.
집까지 돌아오면서 위즈덤 하우스 엄주양 편집자님과 최부장님 차를 얻어 타고 돌아오면서 학생들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느꼈을 무력감, (이런 것 이렇게 열심히 해서 뭐 하나. 나라가 이런데..) 이번주 내내 알 수 없이 내 어깨에 얹혀 있던 우울감의 근원에 대해서 실컷 이야기하며 돌아왔다. 오늘이 지나고 일요일이 되면 무언가 결론이 나있겠지. 두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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