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려나.
한겨레 그림책 5기가 시작되었다.
연초니까 의욕이 많으시겠지, 작년처럼 수강인원이 평소보다 많구나 생각을 했었다.
첫 주 보내오신 글들을 이메일로 오늘 하나하나 답장을 보내면서 예전처럼 빠르게 답장을 쉽게 보내지 못하는 내가 보였다. 첫 주임에도 보낸 글의 소재와 주제가 가볍지 않았다. 그것으로는 표현이 부족하고 내가 예전보다 더 집중해서 마음이 쓰이는 글들이 많았다고 해야 할까.
오후에 이메일을 쓰다가 중간에 출판사에서 갑자기 미안하다는 전화가 왔다. 긴급하고 너무 미안해하는 목소리라서 이유부터 조용히 먼저 들었다. 다 듣고 나니, 그게 도대체 무슨 큰일인지 전혀 공감이 안되어서 기분이 참 이상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나는 수개념도 약하고 머리도 나빠서 그렇게 이야기해도 다 모르고 수습할 수 있는 단계니까 내 기분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고치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 더 이상 그런 일 하나하나 따지고 시간과 마음을 쓰는 게 너무 아깝다. (나는 갑자기 미안하다고 전화하길래 진심으로 대표님이 어디 심각하게 아픈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다들 그런 나이라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하면 이제 진심으로 무섭다.)
그래픽 노블반까지 매주 20명 정도 평균적으로 답이메일을 보내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르게, 이번주는 답장을 쓰는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아이들을 픽업하고 저녁을 먹이고 받아쓰기를 시키고 같이 디딤돌 수학을 풀고 나서 8시 50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분 남은 분께, 내가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답을 못 보내고 있다고 늦은 시간에 죄송하다고 카톡을 보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어떤 분의 글에는 삼십 분이 넘어가면서 답이메일을 썼다.
안산에서 두 시간 걸려서, 지리산에서 다섯 시간을 걸려서 한분이 화요일 저녁 시간을 들으려고 오시는 어르신 두 분이 계신다. 그 정성은 무엇일까. 내 수업을 하나 듣겠다고 왕복 10시간을 왔다 갔다 하신다니, 나는 너무 황송해서 대답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이번 기수의 특이한 점은 내가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난 4년간 처음 있는 일인데 대부분 내 책을 한 권이라도 읽고 오신 분들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강의하는 요일과 시간이 맞는 게 이 수업뿐이라서, 유일한 실기 병행 수업이라서, 그렇게 우연히 나를 전혀 모르는데도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번 기수는 처음으로 내 책을 보고 찾아오신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무척 놀랐다. 내가 지난 몇 년간 낸 책들이 이제야 서서히 읽히고 있는 것일까? 꾸준히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매일 새롭게 채워지는 것 같다.
마지막 줄에 '귀한 글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썼다.
입에 바른말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유난히 이번 기수의 글들은 진지하고 따뜻하다.
두 번째 수업을 앞두고 있는데, 벌써 몇 번은 이메일을 주고받은 기분이 들다니.
강의를 더 늘리지 않고 싶었는데 3월부터 주말반에도 그림책과 그래픽 노블 수업을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시점이 오면 수강생이 배로 늘어날 텐데 이런 밀도로 내가 피드백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나는 작년에 무언가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차갑고 단호한 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어느 정도 무감각 해진 채로 몇 년이 지나가 버리고 있었다. 그걸 자각했다는 것 자체가 아직 내가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믿으며 새해 소망에는 다른 해와 달리 숫자(대출 상환 예상금액이라던가, 책을 몇 권 마무리하겠다던가 그런 것들)를 적지 않았다.
조금 더 나 자신과 주변에 더 친절하고 다정해지자, 그렇게 혼자 다짐을 해본다.
이렇게 작정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지키지 못하고 툭 끊어져 버릴 것 같다.
오늘 이메일을 쉽게 답장하지 못하는 내가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글 한 줄이라도 기계적으로 쓰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은 것 같다. 더 의미 있다.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