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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으로 계속 변화해야만 한다

by 이수연



음악이 레코드판에 기록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기억은 습득된 뒤에 오랫동안 남아 있고 필요할 때 이를 다시 꺼내어 볼 수 있으므로, 기억은 뇌 속 어딘가에 레코드판 위의 미세한 홈과 같이 마치 뇌에 새겨진 흔적과 같이 남아 있다가 내가 그 판 위에 핀을 얹을 때 적절한 음악을 재생하는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기억의 레코드판이 모여 있는 방이라니. 나쁘지 않다. 각자의 취향껏 벽을 칠하고 가구를 들여놓았을 것이다. 하얀 벽이 좋다. 매끈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새로 더하기에 흰 여백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니까. 편안한 소파에 앉아 오랜 시간 수집해 온 레코드판을 구경한다. 어떤 판들은 자주 꺼내 보았기 때문에 커버 디자인 그림이 보이도록, 손에 닿기 편하게 가장 가까운 곳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매일 반복하는 어떤 기억들은 잘 정리를 해서 옆으로 라벨이 붙여져 있다.

매일 같은 음악을 재생하는 것은 너무 따분할까? 아니다. 나는 어떤 음악은 질릴 때까지 몇 주를 반복해서 듣기도 하니까. 어떤 음악은 몇십년째 듣기도 한다. 마음에 들어온 것은 어떤 다정한 한 문장, 어떤 반짝거리는 눈빛. 그런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을 다시, 매일 매일 다시 재생 해도 질리지가 않는다. 질리는 것이 아니라, 바라 보고 들을수록 더 이해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그만큼 그리워하는 마음도 깊어지니까.


숨기고 싶은 기억들은 아마도 방을 가득 채운 레코드판들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모서리, 밑바닥에 깔려있을 것이다. 일부러 거기에 넣어둔 것이다. 그 기억을 가장 밑에 깔아두고, 위로 새로운 것들을 쌓으면 결국 무거워지고 그 기둥이 무너질까 두려워 잘 손도 대지 않게 될것이다. ‘망각’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위로 끊임없이 쌓아야 하겠구나. 참 피곤하고 치열한 일이다. 그 일은 그만 멈추자. 잠시 소파에 앉아 본다.


계속 다시 떠오르는 기억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깊은 감정에 닿았던 것? 깊이? 깊게 홈이 파인 레코드판은 좀 다른 소리를 낼까? 얼마나 다른 소리를 낼까? 하지만 너무 자주 반복해서 기억하면 어쩌면 그것은 정확한 기억이 아닌 것 같다. 원래의 기억과 나의 마음과 바람들이 뒤섞여서 계속 반복 재생되다 보면 어느 날, 그 기억은 원곡과는 다른 왜곡된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 버릴지도.


아홉 살 아이가 자신이 요즘 가장 집중하는 장남감을 나에게 가지고 온다. 아이는 나에게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왜 이게 멋진 것인지 종알 종알 설명을 한다. 한참을 이야기 하던 아이는 갑자기 휙 돌아서 다시 놀이하던 책상으로 돌아간다. 왜 갑자기 ‘엄마, 그거 알아요?’ 하면서 매일 말을 반복하는 것일까? 너는 왜 나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방식으로 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공유하며 조금씩 되새기는 걸까? 나에게 시간을 들여 그것을 설명하고 보여주면서.


소파 옆의 익숙한 레코드판 위에 핀을 올려본다. 그곳에는 방의 비율보다 다소 큰 창문이 있다. 소파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본다. 이런. 예상하지 못했던 센 바람이 창문으로 들이친다. 애써 쌓아두었던 레코드판들이 한꺼번에 우르르르 무너져 내린다.아래 숨겨두었던 망각의 기억이 천천히 드러난다. 그래. 너 거기 있구나. 잘 알겠다. 무언가를 더이상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잠시 그냥 있어 볼까.


우리의 기억이 보관되는 방으로 어떤 시간은 강한 햇빛이 들어 온다. 그리고 잘 보관하고 싶었던 그 수 많은 정리함과 레코드판들을 감싸고 있던 종이 커버들은 햇빛에 조금씩 조금씩 빛이 바랠 것이다. 음악을 재생하던 날카로운 핀도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지겠지. 처음과똑같지는 않겠지만,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좋든 싫든 그 방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덧대고 동시에 잃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 쓸쓸한 상실들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으로 계속 변화해야만 한다. 자신이 가진 측량할 수 없는 기억의 무게들을 버텨내기 위해서.


#기억의방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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