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울고 보낸 하루 보다 나은 하루
인정해야 한다. 매번 무던하다고 우겼지만, 그것은 어릴 때였던 것으로. 아주 성격이 나쁘고 예민하다. 긴장하거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자리에 누워도 잠을 자지 못한다. 오늘은 순천으로 7시 기차를 타야 했으므로 새벽 5시 20분에 알람을 맞춰두고 10시에 누웠다. 하지만 결국 누워서 내내 무언가를 생각했고, 그러다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이럴 수가. 얼굴이 엉망이었다. 눈은 팅팅 붓고. 샤워하고 새벽에 조용조용 짐을 싸서 기차를 탔다. 내 옆자리와 앞자리 두 사람이 코를 골며 자는 것을 보고 부러웠다. 나는 왜 밤을 새도 기차에서 졸지도 못하는 걸까. 순천역에서 내려서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릴까 말까 하다가 대기 중인 빈택시를 탔다. 아니, 그런데, 이 노란 철제로 꾸며진 기찻길을 지나가는 도로는 뭐지? 저 벽돌 교회는? 이 동네는 왜 이렇게 붉은 벽돌이 많지? 날씨 탓인가? 택시 기사님께 몇 번이나 '순천은 처음 와봤는데, 참 예쁘네요'라고 말할 뻔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순천에서 이런저런 전시를 많이 참여했었는데 한 번을 못 왔었구나. 이렇게 내 취향일 줄이야.
[내 어깨 위 두 친구]에 대해 아이들에게 강의를 하라는 것은 너무 서로에게 아닌 것 같아서 [고릴라의 뒷모습]과 [달에서 아침을] 두 권을 챙겨갔다. 역시 그게 맞았다. 강의가 무려 두 시간이었는데 꿋꿋이 들어준 여섯 살 꼬마에게 뭐라고 감사를 전해야 할지. 새를 좋아하고 막시무스 물장군을 제일 좋아하는 소년과 장수풍뎅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아이들이 눈이 반짝 거린다. 장수풍뎅이 진짜 멋지지, 나도 키우다 반했어. 끝까지 안 뛰어나가고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 순천 시립 그림책 도서관은 마당에 가득 김중석 작가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멋지고 힘이 넘치다니! 감탄하며 햇빛을 받고 있는 그림 위에 서서 한참을 보았다. 소장하고 있는 원화들을 한 장 한 장 보지 못하고 나온 것이 제일 안타깝다. 사서님과 점심을 먹고 근처를 살짝 함께 걸었다.
오래되고 아기자기한 동네. 택시에서 스쳐가며 보았던 붉은 벽들. 웃장, 아랫장, 중앙시장이라니. 시장 이름들이 참 이곳과 어울린다. 아니, 핑크색 버스라니. 뭐지? 이 빛바랜 핑크는?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아랫장'을 눈에 담았다. 찍을까 생각하다 그냥 보았다. 알록달록한 파라솔과 가득한 사람들, 시장의 분위기가 이국적일 정도로 생동감이 넘쳤다. 아니, '동천'이라고. 강을 지나간다. 안 되겠다. 찍어야겠다.
날이 좋아서 그런 것인가. 모든 것이 반짝 거린다. 누군가에게는 이곳이 어린 시절 추억이겠지. 내가 살았던 어린 시절 동네는 재개발로 다 없어졌는데, 이 영상 보면 정겹고 그립고 반갑겠다. 30분만 더 가면 여수구나. 여수가 고향인 동생이랑 같이 여행 오면 진짜 재밌겠다. 그전에 한강 작가님의 데뷔작인 여수의 사랑을 먼저 읽어보고 같이 오자고 메시지를 남겼다.
일년전 팔린 그림에 새로운 하얀색 액자가 아름다웠다. 그게 무엇이라도, 그 사람에 손에 들어가면, 그 이전보다 항상 더 맵시있고 가치있게 그것을 다듬는 사람, 섬세한 결을 가진 사람. 다정한 사진이 고마웠다.
눈물버튼이 터질 때가 있는데 오늘도 결국 그러고 말았다. 요즘 누군가와 전화를 하다가, 이야기를 하다가, 책을 읽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그냥 쏟아질 때가 있다. 어린아이들 의료지원 기부이야기를 듣다가 결국 설득당해서 회원가입을 했다. 눈물이 조절이 안된다고 하니까, 안 울고 보낸 하루보다 좋은 거라니. 생각해 보니 정말 맞는 이야기다. 마음이 있는 지도 모르고 지내는 것보다 주책맞게 우는 게 조금 더 살아있는 것이 맞다.
순하고 천진한 사람들이 살 것 같아서 '순천'이라니.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순천의 어떤 것을 다시 보기 위해 또 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책꽂이에 꽂혀져만 있던 태백산맥의 배경이 순천과 여수였구나. 어제 책장에서 그 세트를 보며 이걸 왜 샀을까, 언제 읽을까 했었는데. (읽으라는 계시인 걸까?)
이문재 님의 인터뷰 목소리를 듣다가 지나가는 문장이었는데 '지성과 감성, 영성을 얻기 위해'라는 말이 지나갔다. 문맥상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는데, 그 세 단어를 쓰는 이문재 님이 엮은 책은 어떨까 마음이 갔다. 그래서 두 권을 샀고, 오늘 기차에서 한 권을 읽으면서 돌아왔다.
[당신의 그림자 안에서 빛나게 하소서]라는 기도에 관해서 시와 산문을 엮은 책이었다. 이건 내일 마저 읽고 자세하게 다시 쓸 거다. 붙잡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문재 님에 대한 호기심에서 그분이 선택한 글들을 읽고 나서는 이분이 이제 좋아져 버렸다.
질문의 시작은 그림책이었고, 그것을 대답해 주려고 집에 돌아와서 작업실 책장 앞에 섰다. 책을 몇 권 꺼내다가, '지금 몹시 피곤하고 몹시 행복하다' 이런 말을 중얼중얼거렸다. 아직 안 가본 데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와 많이 많이 마음을 빨리 써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 건지, 먹고 있던 견과류 봉지를 호두 두 개 먹고 잃어버렸다. 결국 못 찾았다. 밥 먹고 두 시간 있다가 누워야 하므로, 이렇게 이상하고 산만한 글을 남기고 있다.
오늘이 지나가면 나는 또 무심하게 무언가를 잃어버릴 테니까. 심지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이제는 정말 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