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을 방해한다. 책상 서랍 아랫 칸에 스마트폰을 넣어둔다. 카톡이 울린다. 광고다.
다시 넣는다. 카톡. 이런, 제법 진지한 질문이 카톡으로 와있다. 대답을 문자로 남길까 하다가 물어볼 일들이 있어서 전화를 걸어야 겠다. 지금 통화 괜찮아? 메시지를 보내둔다.
대답이 금방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작업실 책상 앞에 앉는다. 물통에 붓을 휘젓다가 노랑색을 덧칠한다. 몇 분이 지났을까? 전화가 온다. 스피커폰 모드로 바꾸고 통화를 한다.
-그림 그리는 소리, 다 들려.
-아, 그래? 시끄러워?
-아니. 신기해서. 어떻게 그래?
-이건 오늘 해야 하고, 너하고 통화도 해야 하니까.
뭐가 이렇게 바쁜 걸까.
상대방이 무언가를 하고 있을까봐, 누군가를 만나는 중일까 신경이 쓰여서. 무턱대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는 ‘전화 공포증’이라는 단어도 있다니까. 더 세심하게 미리 문자를 보내야 하고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들 너머로 어렸을 때는 어땠더라, 오래 된 기억이 떠오른다. 친구 둘 셋이서 손을 잡고 우리 집 앞으로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수연아, 놀자!’ 요즘에는 들어보지 못한 거리에 울리던 아이들의 목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양쪽 끝에 고무줄을 붙잡는 친구들, 중간에서 고무줄을 타는 나. 친구들의 얼굴이 햇빛에 일그러 지다가 이내 발갛게 물든다. 이마로 등으로 땀이 흐른다. 계속 노래를 불렀고, 신발은 벗어 던진지 오래다. 맨발로 시멘트 바닥을 오가면서, 그날 저녁이 찾아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서로의 주변을 빙글 빙글 맴돈다. 바닥에서부터,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높게 까치발을 하고 손을 뻗어 고무줄을 높게 잡는다. 골목길에서 아이 셋은 수시로 부딪히고, 때로는 편을 가르고 싸우기도 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깔깔깔 웃어 재낀다.
충분히 부딪히고 있는 걸까?
작은 작업실 방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그런 생각이 든다. SNS가 울린다. 이내 알림은 사라지고 연관도 없는 다른 포스팅을 감흥 없이 손가락으로 넘긴다. 이런 식으로는 인간은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다. 이걸로는 어림도 없다.
어제 나눈 대화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다. 수화기 너머로, 첫마디부터 끊을 때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말을 많이 했지만, 어떤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다. 말은 하면 할수록 너무 가벼워질 때가 있다. 의도하지 않은 속도로 빠르게 날아가 꽂혀 버린다. 대화가 끝났다. 바로 후회를 한다. 하려던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그게 아니었는데.
몇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이 얼마 없다. 서둘러서 나갈 준비를 하는데 어색하고 불편한 얼굴이 급하게 지나간다.
각자의 일로 더 바쁜 척을 하다가, 그만.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깐. 잠깐.
손에서 하던 일 좀 그만하고 나 좀 봐.
잠깐 이쪽 좀 봐.
우리는 언젠가부터 잃어버린 지도 모르고 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능력들.
슬픔에 찬 상대방의 눈빛을 마주 보는 일.
화가 난 경계하고 있는 그 눈빛을 마주 보는 일.
그 눈을 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일.
사과의 의미를 담아서 무언가 말을 하는게 맞는 것일까?
아니. 이런 상황에서 말은 너무 조급하고 늘 오해만 만드니까.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어색하게 서 있는 몸을 돌려 목에 천천히 팔을 둘러 본다.
방금 집으로 들어온 몸에서 땀냄새가 번진다.
-낮에 더웠어?
-응.
조금 더 꼭 팔을 둘러본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꼭 껴안아 본다.
말은 많은 것을 바꾸고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상대의 품을 꼭 안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 아직 남아있는 화의 냄새가 땀냄새와 섞여있다, 어린시절 고무줄 놀이를 하던 친구들의 옆얼굴로 흐르던 땀처럼, 내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어떤 순간의 잊지 못할 향기들.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조심스럽게. 원하는 만큼 서로에게 절대로 닿지 않기 위해 많은 막을 세워둔다. 나는 누군가에게 문자로 전화 속 목소리로 존재하는 무언가로만 남고 싶지 않다. 우리는 더 몸을 움직이고, 살아있는 것들 옆으로 걸어가고, 찾아내서 손에 그러 쥐어야 한다. 살아서 반짝이고 있는 눈을 보고, 그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같은 햇빛을 쬐고, 용기를 내서 서로를 눈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말로 무언가를 표현하는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벅차는 날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그냥 꼭 껴안아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무엇이 있을까? 다른 무엇이 있을까? 잠시 그렇게 멈춰서 그 순간을 깊게 만끽해야만 한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아주 천천히 내쉰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고, 조금씩 천천히 자라날 수 있다.
친구들과 실컷 고무줄을 하다가 회색 시멘트 바닥을 본다. 어느새 바닥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간다.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와 새까매진 발을 닦고 차가운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본다. 온전하고 충만한 기분이 가슴에서부터 온몸으로, 손끝까지 발끝까지 번진다.
달디 단 잠이 천천히.밀려온다.
#만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