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조용히 천천히 모로 눕는다.
곤히 자는 눈썹과 입술을 바라본다. 손끝을 들어 조심조심 앞머리카락을 치운다. 조금 더 아래로 손가락을 내려서 뺨을 콕, 힘을 빼고 눌러본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을까?
내 귀를 양손으로 잡고 마구마구 부비는 입술.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종알 종알거리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마저도 부드럽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한숨 한 번에 저만치 날아가 버리는 노란색의 가벼운 깃털.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에 어떤 그림책의 한 페이지에 멈춰서 종이를 매만지는 조용한 손가락 끝. 부드러운 것들이 훑고 지나간 순간은 여운이 오래 남는다. 잘 잊히지 않는 무언가가.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결에 대한 감촉을 생각한다.
감정에 예민한 내가 싫어서 그것을 고쳐보려고 노력하던 시간이 오랫동안 있었다. 버석하고 굳어가는, 그렇게 천천히 굳어지다가 멈춰버리는 심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도 있었다. 바짝 말라서 조금만 뒤에서 톡 건드려도 바사삭 부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것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것.
서글펐다.
그저 한 문장이었다.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 있을 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그 문장이 계속 생각이 났다. 계속 되뇌다가 조금씩 작은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소곤소곤 작은 속삭임 같이 힘이 없었는데, 내가 귀를 기울일수록 그 힘이 세지고 있었다. 그렇게 차분하게 이야기하기까지 그 문장 안에 담겨있을 눈물과 끊임없이 되새겼을 다부진 다짐 같은 것들이. 그것은 그 단단한 문장 안에만 머물지 않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내 안으로 조용히 천천히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만 머물기에는 매우 부드럽고 유연했다. 그래서 가만히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내 몸속을 흐르던 그 문장은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고, 다시 내 귀로 흘러 들어가서 마음으로 번져 나갔다.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나는 넋을 놓고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조금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아니다. 조금 많이 엉망이 되었다.
버스에서 아빠를 닮은 뒷모습이 내 앞에서 내리는 걸 보고 갑자기 눈물이 났다.
전시회에 찾아온 어떤 사람과 그분의 엄마를 보고 눈물이 났다.
길을 걷다가도 이유 없이 눈물이 났고, 전화를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새벽에 뜨는 해를 보다가 눈물이 나다니.
꿈속에 나오는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들이 잠에서 막 깨어난 나를 울리다니.
팔베개를 해주다가 내 팔 위에 비벼지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뺨 때문에 내가 울게 될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있는 지도 몰랐던 심장의 어떤 부분에 그만 ‘부드러운 것’이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지난주에 절판된 책을 찾다가, 해당 출판사에도 연락을 해서 찾아보았지만, 재고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더 찾아보다가 언젠가 운명처럼 중고 매장에서 만나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찾는 것을 그만둬 버렸다. 읽게 되는 시기가 늦어져도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방금 어떤 부드러운 사람이 그 책을 어디선가 구해와서 내 앞에 무심하게 툭 내려 두었다.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구했을까? 아니, 내가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걸 기억해 두었다가 이렇게 찾아오다니.
이런 것에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부드러운 것은 그 어느 것보다 터프한 힘이 있다.
부드러운 사람은 애쓰지 않아도 상대를 녹여 버린다. 전혀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자, 애를 쓴다고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 마음은 그런 것이니까. 나는 그것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이런 것에 한없이 약해져 버렸다. 그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 앞에서는, 나는 그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런 난감한 순간들이 참 반갑고 기쁘다.
#부드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