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성 눈병이라니. 오늘 같이 바쁜 날. 오늘 여러 가지 마감이 있는 날인데. 왜 하필 오늘.
집에서 작업하니까 아이가 아프면 그날은 아이와 함께 지내며 무척 산만해진다. 어쩌지.
빨간 토끼눈을 하고 눈이 따갑다며 울상인 아이를 바라본다. 하얀 얼굴에 눈이 빨가니까 토끼 같다. 안쓰럽기도 한데 귀엽기도 하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빤히 바라보았는데도 갑자기 수줍다는 듯이 웃는다. 내 마음이 눈으로 다 읽혔나 보다. 이럴 때 보면 아이들은 어른 보다 더 귀신같다.
아침부터 업데이트 중이던 컴퓨터가 멈췄다. 이상하다. 세 시간 째라니. 이건 비상사태인 것이다. 단골 컴퓨터 에이에스 센터에 전화를 하니 가지고 오란다. 출장불가라고. 내가 혼자였다면 바로 갔겠죠. 어쩌지. 눈이 따가운 아이를 데리고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버스를 타야 하는 길이라니. 그래도 마감은 코앞이니까. 읽어야 할 이메일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게 스마트 폰으로 보인다.
전철 안에 금요일 오후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가. 꽃이라도 보러 나온 것인지. 사람이 너무 많다. 문이 열리고 어르신 한분과 청년이 탄다. 둘 다 손에는 초록색 수레에 무거워 보이는 상자가 꽁꽁 묶여있다. 잘은 몰라도 아마도 택배 노동자인 것 같다. 아이가 힘들어 보이니까 어르신이 노약자 석에 앉으라고 권해 주셨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앉혔다. 아이 앞에 서서 아이 눈을 보면서 서있는다. 밖에 나오니 몸이 조금 불편해도 조금 들떠 보이는 얼굴이다.
그때 큰 소리가 갑작스럽게 끼어든다.
-월세는 안 돼요. 전세를 얻을 거예요!
지나치게 큰 목소리다. 내 바로 뒤에서. 굳이 듣고 싶지 않은 남의 이야기. 너무, 너무 지나치게 크다.
-나라에서 지원을 해준대요. 독립할 때가 됐잖아요. 제 나이가 이제 그런 나이니까요!
그때 알게 되었다. 언뜻 지나가면서 본 내 뒤에 선 사람은 청년이고 건강해 보였다. 말투도 또박또박, 발음도 정확했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었다. 지나치게 큰 목소리, 가림막이 없는 말의 내용이 알려주고 있었다. 이 사람은 평범한 성인의 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대중교통 안에서 큰 소리로 외침에 가까운 목소리에 잠시 짜증을 냈던 게 미안해 지려고 하는데, 옆에서 어르신이 조용조용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대답을 이것저것 해주신다. 어르신은 분명히 아주 세심하고 선하신 분일 것이다.
귀 기울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곧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흥분한 듯, 너무 큰 목소리의 청년이 엉뚱한 문장을 공중에 외쳤다.
-사람하고 말하는 게 진짜 좋아요. 너무 외로워요!
그게 다였다.
앞에 앉아있는 아이의 빨간 토끼눈을 보다가 그만 버틸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났다.
전철문이 열렸고 두 분이 수레를 끌고 탈 때처럼 조용히 내렸다.
저런 말을 저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그 청년의 마음을 내가 얼마나 안다고,
그게 뭔지 뭘 얼마나 안다고. 마음이 아프다니.
태어나서 처음 만났다.
저렇게 크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저 문장을 외치는 사람을.
뒤돌아 보지 않아서 얼굴도 모르지만.
그리고 보는 것 자체가 무례인 것 같아서 가만히 서있었지만.
대부분, 누군가와 말하고 있다고 그 고독은 절대로 매워지지도 않아요. 안 그런 척하면서 사는 거지.
당신하고 똑같은 생각 다들 하며 살아요.
그렇게 크게 외칠 용기가 없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