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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만족 할 수 있다면.

권희철 평론가의 해석 필사 기록.

by 이수연

권희철 평론가의 해석이 인상적인데 한번에 쉽게 이해되지가 않아서 방송을 듣고 받아 적어보았는데, 이거 집중하는 힘이 상당히 필요한거구나.

계속 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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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죽음의 순간, 개인은 자신이 완성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미래로부터 분리되지만 이제 유토피아의 변형된 시간은 영속적 현재를 만들어 내며 그 현재 속에서는 매 순간 특수하면서도 전면적인 존재론적 만족이 존재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죽음이 앗아갈 것이 남아있지 않다. 이미 완전히 실현된 삶은 죽음도 손상시키지 못한다. 마침내 존재속으로 들어와 그 존재속에서 실현된 핵은 그 실현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죽음의 영역 바깥에 놓이게 될 것이다. 죽음은 그것을 포함하는 그 '과정 지향적 불충분성'과 함께 하찮아지고 사실상 죽음 자체가 죽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신비는 여전히 유한한 존재지만 영생을 알게 될 것이다.


프레데릭 제임스 [막스주의와 형식]의 한 대목.

문학연구자, 문학 비평가들에게는 고전적인 책, 매력적인 비평이론을 읽고 싶다면 도전해 볼 만한 책.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읽으면서 죽음과 그 극복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죽어 잇거나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요. 우리는 죽음이 그 최종운명으로 결정된 존재들이고 이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니까요.

그런데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상한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우리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생을 알게 될 것이라고요. 죽음 자체가 죽어버릴 수 있다고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는 한 가지 조건 속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핵이 실현되는 경우. 그리고 이 조건을 다른 말로 '유토피아의 변형된 시간'이로도 부르고 있습니다. 좀 어렵고 불친절한 대목이지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은 신화 속의 크로노스가 그런 것처럼 무섭고 파괴적인 데가 있습니다. 그 왜 잠들어 있는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한 신이 있잖아요. 나중에 자기도 아버지 우라노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식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봐 낳는 족족 자식들을 계속해서 잡아먹었다가 그의 아들 제우스에게 제압되는 신이 있지요. 그 신의 이름이 '크로노스'인데 이 이름이 곧 시간을 뜻하기도 합니다. 시간은 끊임없이 어떤 순간들을 낳고 있지만 그 모든 순간들을 집어삼켜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라는 블랙홀 속으로 밀어 넣어버리니까요. 그 크로노스라는 신의 모습이 시간의 모습이기도 하겠죠. 크로노스적인 시간은 언제나 우리 곁을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 버리고 우리가 놓친 것들은 크로노스의 크게 벌려진 입속으로 삼켜지지요, 그래서 우리는 매번 많은 것들을 잘못해 버리고 실수해 버리고 가질 수도 있었을 기회들을 날려버립니다. 하지만 크로노스 적인 시간은 과거를 향해 끊임없이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래로부터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실수를 만회하기도 하고 날려버린 기회 대신에 다른 기회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 속에서 놓친 것을 미래에 만회하며 완성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희미한 희망인 것이죠. 하지만 새롭게 쏟아져 들어오는 미래라는 것도 결국 또 실수하고, 기회를 놓쳐버리며, 망쳐버릴게 분명하다는 것이 우리의 절망이지만요. 어쨌거나 그것이 절망의 원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미래로부터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우리에게 남아있는 얼마 없는 희망인데 크로노스적인 시간의 어떤 시점에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더 이상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죠. 죽음에 이르면 미래에 시간에 보충되리라고 기대했던 과거로 사라져 버린 가능성들의 손실은 이제 만회할 길이 완전히 차단됩니다. 아마도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것 이겠죠. 죽음은 우리의 삶을 완성시킬 수도 있을 얼마 남지 않은 희망마저도 증발시켜 버리는 것이니까요. 우리의 삶을 끝내 미완인 채로 남게 하니까요. 에린스트 블로흐가 '과거 지향적 불충분성'이라는 는어려운 말로 굳이 설명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에서는 과거에 의해 삼켜지고 있지만, 그 잃어버린 것을 만회하기 위해 미래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크로노스적 시간의 속성이 과거지향적인 것이겠죠. 하지만 새로 유입된 미래라는 것도 역시 충분히 음미되지 못하고 시간 안에 들어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현실화하지 못한 채 또 과거에 의해 삼켜져 버리겠죠. 그래서 불충분성입니다. 죽음에 의해 크로노스적 과정이 멈출 때 그 불충분성. 삶이 미완인 채로 남겨졌다는 사실이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겠죠.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어떤 순간을 미처 다 음미하기도 전에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가진 깊이의 최대치만큼 모조리 체험해 버릴 수 있다면, 거기에 내재된 어떤 기회들을 실현하며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면, 그 순간만큼은 삶이 완전히 실현된 것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 삶은 순간 속에서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에 놓쳐버린 기회라는 것은 없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크로노스에게 삼켜질 것도 없겠죠. 아쉬움을 남기는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 같은 것도 없으니 미래로부터 우리가 분리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수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게 완전히 실현된 삶이라면 죽음조차도 손상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죽음은 이제 하찮은 것이 돼버렸으니 우리 유한한 존재들이 영생을 얻게 된 것과 다름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기회의 순간들을 헛으로 흘려버리는 사람들은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언제나 더 긴 목숨의 연장을 원하겠죠. 아직 실현시킬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진한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짧은 삶을 살았더라도 그가 자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동의하고 긍정할 수 있는 어떤 강렬한 순간을 체험했다면 그해서 어떤 전면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 완전히 실현된 하나의 순간이 결국 그의 삶을 완전히 실현해 주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그것이 그의 유한한 인생을 영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이 만족에 도달한 사람들은 정확히 만족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삶을 한번 더 겪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에 불만족의 불순물이 잔뜩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 전체를 최종적으로는 만족으로 바꿔놓는 강렬한 순간이 있기 때문에, 그 강렬한 순간을 포함하고 있는 삶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한번 더 겪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중략)

같은 것을 한번 더 외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현재에는 이미 미래가 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미래는 정확히 현재가 반복되는 것이니까요. 미래가 포함된 현재, 미래에도 반복된 현재, 과거에 의해 삼켜질 수 없는 현재를 에른스트 블로흐는 조금 어려운 말로 영속적 현재라고 불렀고 바로 이것이 '유토피아의 변형된 시간'이라고 썼습니다. 크로노스의 집어삼키는 통치가 끝난 시간이지요. 그리고 여기에는 아직 알지 못하는 아직 오지 않은 어떤 시간이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 실현될 무엇인가가 미래에 남겨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실현된 존재의 핵이지요. 이야기가 조금 산만해 해 진 것 같네요. 다시 정리해 보자면 에른스트 블로흐와 그를 읽고 있는 프레데릭 제임스는 어떤 순간 안에서 전면적인 만족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완전히 실현된 삶이며, 완전히 실현된 삶은 비록 유한하다 할지라도 죽음에 손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승리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 승리를 내세적 종교형태용어를 사용한다면 '영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앞에서 읽어드렸던 프레드릭 제임스의 까다로운 문장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보통은 죽음이 순간 개인은 자신이 완성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미래로부터 부자비하게 분리되지만 이제 유토피아의 변형된 시간은 영속적 현재를 만들어 내며 그 현재 속에서는 매 순간 특수하면서도 전면적인 존재론적 만족이 존재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죽음이 앗아갈 것이 남아있지 않다. 이미 완전히 실현된 삶은 죽음도 손상시키지 못한다. 마침내 존재속으로 들어와 그 존재속에서 실현된 핵은 그 실현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죽음의 바깥쪽 영역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그것을 포함하는 그 '과정 지향적 불충분성'과 함께 하찮아지고 사실상 죽음 자체가 죽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신비는 여전히 유한한 존재지만 영생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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