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림, 글, 쓸모와 무쓸모의 대화.

그 모든 것의 생명력

by 이수연

목요일이었는지 화요일이었는지 요일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매주 같은 요일 아침에 찾아오셨다. 2019년의 나는 전혀 잠을 자지 못하고 이틀을 버티기도 했다. 어떤 밤에는 잠이 전혀 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 조금 미쳐있었던 것도 같다. 미친 듯이 화가 나다가 무섭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사람이 너무 각성해 있으면 쉽게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문 앞에 인기척이 느껴지면 겨우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잠옷 그대로 문을 열었다. 벌써 아침이라니. 그러면 문 앞에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가 서있었다.


해드리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항상 같은 요일 아침에 찾아온 그 천사.


나와 함께 아이들의 옷을 챙겨 입히고 함께 소아과에 가기도 하고, 공덕에 있는 치료센터에 가서 한 시간 넘는 대기시간 동안 조용히 대기하는 방에서 같이 기다려 주셨다. 나를 그렇게 도와주시기에는 우리는 친구도 지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사이였지만, 그 당시 나는 내가 너무 힘들다는 핑계로 염치도 부끄러움도 이미 없었다. 가깝지도 않은 분의 말도 안 되는 호의를 일 년 남짓한 시간을 누렸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누군가에게 그래도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격의 없는 친절을, 배려를. 그렇게 누려도 되는 이유 같은 것은 아무것도, 내가 아는 세상에는 전혀 없던 것이었다.


-이번 책에요, 누워 있는 여자 아이 얼굴이 바다 얼굴이랑 똑같아요. 자고 있는 눈이나 입술 그런 거요.

-진짜요? 그거 14년 전에 그린 건데... 얘들 태어나기 한참 전에 그린 건데?

나랑 함께 자고 있는 아기 얼굴을 오래오래 보신 분이 그렇게 말하시니까 그런가 그림이 다시 보인다.

바다는 나를 많이 닮았다. 파란 옷을 입고 나가도 딸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유난히 속눈썹이 길고 입술이 빨갛던 바다.

대학원 시절,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자화상은 도대체 어떻게 그리라는 건지. 나는 유난히 내 얼굴을 그리는 것을 힘들어하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습작을 그리면서 주인공 소녀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지 몰라서 엄청나게 그리고 비컷으로 남겨두지도 않고 지워버리거나 버린 그림도 많았다. 그때 그렸던 그림이 이렇게 아이들이 크도록, 뒤늦게 14년이 지나서 출판이 될 줄이야.


아이들이 아기일 때 아빠가 아직 암진단을 받기 전, 나를 도와주시러 오셨을 때 나는 아이들이 낮잠을 잘 때 하루에 한 장씩 한동안 아이들을 그렸었다. 아빠가 세 살짜리 아이들과 같이 동요를 틀어두고 신나게 춤을 추셨다. 그런 시간이 있었다니. 그게 불과 몇 년 전이었다니. 나는 지난 몇 년 간이 마치 아주 오래전 시간처럼 아득해 지곤 한다.


그때쯤 위즈덤 하우스 출판사에서 [사자와 소년]이라는 책에 삽화 작업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낮잠 자는 바다의 얼굴을 주인공 아이의 얼굴로 따라 그렸었다. 대학원 시절 튜터 클로이가 내가 인물을 그리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니까, 아이를 낳으면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유용하다는 이 말을 해주셨는데, 그 말이 그때가 돼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 통화를 하다가 처음으로 소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진짜 바다를 닮았나? 나는 나도 모르게 나의 아이시절의 얼굴을 그렸던 걸까?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말하고 쓰고 그려내는 모든 것들의 그 시작과 그것들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나는 다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가늠도 전혀 못할 때도 더 많은 것 같다. 아주 희미하고 막연하게나마 알아가고 있는 것은, 그것이 분명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힘을 가지고 있고 나의 삶에 어떤 분명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쓸모 있는 말들과 무쓸모한 말들을 잔뜩 나누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대화냐면서 카톡을 나누다 웃음이 터졌다. 꿈속에 보았던 장면을 이야기하고 쓰고 수다 떨고 그것을 그리라고 했더니 그리고, 또 같이 보고, 그게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한다는 거. 사람들이 들으면 하나도 쓸모없는 것들. 힘들고 우울해서 아침부터 청소를 했다고, 치약을 쓰면 수전도 반짝반짝한다는 쓸모 있는 이야기도 조금 했다. 우리가 나누는 이런 쓸모와 무쓸모의 대화도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겠지. 덕분에 조금 웃었거든. 웃다가 옆에 앉아서 엄마, 왜 웃는 거냐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바다의 입술에 뽀뽀도 했거든.

나는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알고 있을까? 아마 영원히 모르는 게 훨씬 더 많겠지.

스쳐 지나가는 작은 것들이 소중해서 자기 전에 이렇게 또 조금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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