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인 수면장애 때문에 ‘정신건강의학과’라는 거창한 이름의 병원에 가게 된 것은 지난겨울부터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동네 가정의학과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버티고 있었다. 그 가정의학과 선생님의 권유로 조금 더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위해 병원을 옮긴 지 6개월째였다. 교감 신경, 부교감 신경의 균형이 깨졌다는 그런 진단이 나왔고, 안정제를 처방받았다. 생각보다 그 한 알의 약은 꽤 효과가 있었고, 잠을 조금이라도 잘 수 있었다. 의사와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2분도 채 말을 나누지 않았고 나는 큰 어려움 없이 한 달 치의 약을 타서 병원을 나섰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의사가 나에게 다른 제안을 한 것이다.
-이런 식의 처방은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해요. 장기적으로 수면의 장애를 극복하려면 원인을 알아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검사와 상담을 받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다른 날의 나라면 조금 반응이 달랐을까? 그날은 모든 것이 나빴다. 그냥 다른 때처럼 바로 안정제를 처방하고 나를 보내달라고. 다음 일정 때문에 마음이 급한, 하필 오늘.
-6개월 전에 했던 그 검사를 또 하는 건가요?
-아니요, 이번에는 다른 검사도 병행할 겁니다. 수면장애의 원인을 찾으려는 거죠. 그래야 앞으로의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까요.
-제가 검사를 받고 싶지 않다면요?
-그건 환자의 선택이지만, 그렇게 계속 거부를 하시면 저도 진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스마트 폰으로 짧게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한 5분 정도 시간 되실까요? 저 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
-예. 물론요.
-저는 진료를 중단한다는 그 말이 조금 거부감이 드네요. 마치, 검사를 받지 않으면 안정제를 처방해 줄 수 없다는 말이, 마치 새로운 병원을 다시 찾으라는 말로 들려요.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 병원의 치료 방향은 환자가 가진 어려움의 원인을 찾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의사는 대답을 하면서 항상 그렇듯 아주 가벼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또박또박 정확한 말투. 하얀 가운과 눈은 전혀 즐겁지 않은 입술만 움직이는 그 기계적인 미소. 나는 여섯 달 전부터, 처음부터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 7년간 맞는 수면유도제나 안정제를 찾으려고 오랜 시간을 썼고, 여러 병원을 찾아가야 했는데,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걸까? 그건 아닐 텐데, 왜 그날따라 나는 그 모든 것이 거부감이 들었던 걸까. 사실, 의사의 말은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의사가 또 싱긋 짧게 웃었다. 참아야 하는데...
-그렇게 웃지 마세요,
-예?
-이렇게 말해서 죄송한데, 처음부터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웃는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요. ‘가짜’로 짓는 표정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요.
-예?
-전 직관이 강한 사람이거든요. 선생님에게 제 이야기를 털어놓고 상담을 하고, 검사를 받으며 솔직해지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서 검사를 받는 것에 거부감이 생겨요.
-환자분의 의견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병원은 각자의 치료방법과 방향이 있는데, 모든 것을 그렇게 환자분의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어느 병원에 가도 같으실 거예요.
아, 그렇구나. 내가 또 내 ‘마음대로’ 하려고 했었구나. 또 누군가에게 필요 없는 고집을 부렸구나. 가깝지 않은 타인이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무례한 문장이 아니었을까? 당신이 짓는 표정이 처음부터 가짜로 느껴졌다니, 왜 그렇게 까지 말해야 했던 걸까?
의사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언가 균열이 일어난 것처럼 깨져버렸다. 얼굴의 어느 한 부분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이런 걸 보려고 한 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상처를 준 것 같네요. 미안해요. 그건 아니었는데...
지나치게 무례했다. 진료실을 나오기 전까지 나는 아마도 세 번의 사과를 반복했다. 내가 내뱉은 날이 서 있었던 문장. 그 말을 건네주고 그때는 바로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병원을 나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무심코 내뱉은 문장 때문에 내가 더 깊게 찔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마음이 쿡쿡 쑤시며 아파왔기 때문이다.
다섯 살 아이도 아는 일인데. 이건.
바다가 꼬마 나무 의자를 창가로 천천히 가지고 간다. 그리고는 그것을 반듯이 놓고는 엉덩이 닿는 부분을 탁탁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일로 와 봐. 여기 앉아 봐.
이제 막 긴 문장을 간신히 말할 수 있는 바다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아빠와 내가 이야기를 하다가 목소리를 높이자 지켜보고 있던 바다가 의자를 끌고 갔던 부분부터 기억이 난다.
- 그렇게 화를 낸다고 뭐가 해결 돼? 여기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
한 번 더 바다가 작은 통통한 손바닥으로 의자를 탁탁 두드린다. 바다의 유난히 맑고 가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조용히 생각해 봐.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그리고 이야기해 봐,
아마도 다정하고 인내심 많은 어린이 집 선생님들이 알려준 행동이겠지. 아이들이 짜증을 낼 때면 그렇게 아기 의자에 앉혀두고 화를 삭이는 시간을 어린이집에서 가졌겠지. 바다의 차분한 발걸음과 단호한 손짓, 어른이 앉기에는 너무 작고 귀여웠던 그 나무 의자.
우리는 왜 화가 났었는지도 다 잊은 채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거르지 않고 누군가에게 날것의 감정을 쏟아붓다니,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다. 그래. 다섯 살 아이도 다 아는 일이다. 부끄럽다. 그렇게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한다고. 전혀 아무것도 괜찮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엉망이 될 뿐.
얼마 전 나에게 어린 시절의 상실된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았다. 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고 대답했다. 오래된 불면의 원인 중 하나는 아마도 ‘안전’ 일 것이다. 온전하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언제 마지막으로 가져보았던 것일까. 무언가가 두려운 사람은 공격적으로 변한다. 날 서 있는 모든 말은 거기서 시작된다. 무서웠다. 새로운 병원을 또 찾아가서 지난 몇 년간의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피로감, 여러 번의 상담을 하고 검사를 받고 나의 객관적인 상태에 진단을 듣고 마주하는 것. 무엇보다 나의 마음의 일부분을 편안하지 않은 곳에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를 짜증 나게 했다. 나는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바로 받아들일 만큼 나는 성숙하지도 용기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그날 밤부터 작은 안정제를 반으로 쪼개 먹었다. 한 달이 지났고, 두 달이 거의 다가오며 이제 겨우 두 조각이 남았다. 천천히 작은 나무 의자를 창가로 끌고 가본다. 앉아서 조용히 차분히 생각해 보자. 이 두 조각마저 반으로 쪼개 먹고 나면, 나는 그 미소가 서투른 의사를 다시 만나러 가게 될까? 미루고 피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용기 있게 실수를 마주 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잠시 뒤쪽으로 밀어내어 보자. 나는 스스로에게 ‘안전’한 사람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믿음직’ 스러운 사람일까?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걸 행동으로 증명해 낼 수 있다면. 나는 조금은 더 평화로워 지겠지. 어쩌면 그날 밤에는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푹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