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천사는 내 키만큼 높은 단상 위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안녕? 오랜만이다.
아주 오랜만이다. 거의 이십 년 만이니까.
-나는 너를 왜 아기천사로 기억하고 있었을까?
이렇게 키가 큰 천사였는데. 심지어 머리가 짧은 곱슬머리라고 생각했어.
-그래? 왜 그랬을까?
-너를 볼 때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다 진실이 아니라는 거를 확실히 알 것 같아. 다시 와서 너를 보지 않았다면 내가 잘못 기억하는 줄도 몰랐겠지.
천사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살짝살짝 발을 움직인다. 이내 천천히 돌단상에서 내려와서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동자 부분에도 살짝 동그랗게 정이 쪼여져 있었고 얼굴선의 섬세한 곡선이 놀랄 만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진실하게 선한지 악한 인지 사람들은 다 알 수가 없다는 생각.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절대로 다 말하거나 보여주지 않을 거니까.
-그럼, 나에게는 말해줄래?
-글쎄.. 너에게는 굳이...
천사는 부스스 일어나 작은 등이 켜진 기다랗고 좁은 돌길을 따라 같이 걷자는 듯한 몸짓을 보였다. 우리들은 작은 비석이 서있는 무덤과 장독대, 하얀 이름 모를 꽃이 피어있는 꽃나무가 서있는 그 길을 천천히 함께 걸었다. 굳이 무언가를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기대했다. 내 옆에 걷고 있는 이 갈색의 얼룩 덜룩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천사는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에게는 없는 어떤 초월적인 능력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빛이 있었어.
-빛?
-응, 꿈속이었지만 생생하게 그 빛과 온기를 느낄 수 있었어. 내가 일어나서 문 쪽을 바라보자 격자 사이로 흰빛이 들어오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눈을 떴어.
그 터져 나오던 강렬한 빛을, 그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너는 다 알고 있겠지.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네가 그런 기억을 가지게 되어서 슬프니?
-슬플 때도 있지.
천사는 정이 쪼여진 돌로 만들어진 두 눈동자로 부드럽고 매끄럽고 웃어 보였다.
-여기를 봐.
야트막한 돌 뒤쪽이라 아무도 보지 않는 눈길이 가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다.
폐쇄된 문 근처의 특별할 것 없는 돌이었다. 일부러 찾아오는 이가 많지 않은 곳이었다.
연보라색 은방울 꽃이 그곳에 피어 있었다. 은은한 레몬향과 달큼한 사과향기를 닮은 향이 났다.
-종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이 꽃을 보고 종을 만든 걸까?
-아마도. 사람들은 자연을 보고 많은 것들을 따라 만들었으니까.
벌써 유월이 되었구나. 이 아름답고 수줍은 꽃은 이렇게 반음지에서 잘 자란다.
해가 너무 잘 드는 곳에는 자라지 않아.
-이렇게 아무도 보지 못하는 돌담 뒤에서 자라다니, 조금 서글프네.
-그래도 너와 내가 지금 이렇게 보고 있잖아. 꼭 보고 싶어 하는 이에게, 간절하게 찾는 이에게만 보일 거야.
나는 이번에는 잘못 기억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또렷하게 동그란 꽃잎을 두 눈에 담았다.
-그래, 나는 이 꽃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너는 이 꽃이 조금 더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아름다운데, 아깝잖아. 아니다. 아무나 함부로 보지 못했으면 좋겠어. 속으로는 진짜로는 나만 보았으면 하는 건가. 내가 제일 처음 보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묘하게 기쁘네.
이기적이지만, 이렇게 기쁘다니.
천사는 조용히 청동 문과 돌 사이로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은방울 꽃 한 송이를 꺾어 내 스케치북 안에 조용히 꽃을 눌러 넣었다.
아무 소용이 없다. 너에게 거짓말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어. 이미 천사는 다 알고 있으니까.
-너는 한 번은 내가 학교 다닐 때 내 옆을 함께 걸었던 적이 있지?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서 커다란 학교 책가방에 날개를 구겨 넣고서는 내 옆을 따라 걸으며 귀찮을 정도로 계속 말을 걸었잖아. 네가 너무 말이 많아서 깜짝 놀랐어.
너는 한 번은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 옆에 바람으로 지나갔지. 바람결에게 내가 ‘핫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중얼거렸어. 그리고 집에 돌아왔더니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핫케이크 냄새가 나는 거야. 처음에는 배가 고파서 착각했다고 생각했는데, 달콤한 냄새가 너무 가까운 거야. 이상해서 식탁 위를 봤더니, 옆집에 사는 고모네 집에서 핫케이크를 접시에 담아두고 ‘많이 먹어’라고 메모를 남겨두고 갔었어. 핫케이크는 아직도 따뜻했지. 내가 바람결에 속삭이자마자 바로 갓 구워진 따끈따끈한 핫케이크.
너는 한 번은 내가 사거리에서 넘어졌을 때 내 두 다리 위에서 내 두 무릎을 안아 감싸고 있었지. 급하게 달려오던 하얀 트럭이 내 다리를 깔고 지나가지 않도록. 바퀴는 정확하게 내 무릎에 부딪히자마자 멈췄어. 너무 큰 트럭이었어. 아저씨는 나를 보지도 못하셨지. 나중에 사거리에 있던 야채가게 아줌마가 엄마한테 그 이야기를 전했더라고. 나는 그게 너무 꿈같아서 진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닌지 구분도 잘 안되었거든.
더 어린 시절로 가볼까.
너는 한 번은 내 머리를 감싸주기도 했지.
나는 새로 이사 간 집의 수리가 한창인 곳에서 앉아서 생무를 씹어 먹고 있었어. 그러다가 유리로 만들어진 커다란 미닫이 문이 작은 내 머리 위로 쓰러졌어. 유리가 바로 내 눈앞까지 왔던 순간까지 기억나. 셀 수도 없이 많은 조각으로 유리가 쪼개졌어. 아빠가 그랬어. 내가 그 커다란 문 밑에서 티끌만큼도 베지 않아서 유리 조각을 치우며 내내 놀랐다고.
너는 내가 아이였을 때 크고 작은 순간순간, 나를 찾아와서 지켜주고 안아주고 내 말을 들어주고 말을 걸었어.
그런 순간들 덕분에 고통스럽고 고독해도, 이 세상에 무언가 다른 게 분명히 더 있을 거라고,
내가 보았으니까. 아무에게 말하지 않아도, 혼자서도 조용히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었어.
어떻게 보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는 일들이라, 어른이 되면 대부분 너를 잊어버리는지도 몰라.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기도 전에. 찾기도 전에. 정확하지는 않았어. 모든 게.
그래도 이렇게 기억에 남아주어서 고마워.
고마워.
나이가 이렇게 들어도 아직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 줘서.
-오래 못 있어.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또 올 거야?
-내가 찾아올게. 네가 나를 잊지 않으면. 내가 있다는 것을 계속 믿는다면.
-어떻게 내가 너를 만났다는 것을 계속 믿을 수 있지? 이건 내가 보는 환상일 수도, 꿈일 수도 있잖아.
천사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다시 무심한 돌담 위로 천천히 기어올라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충분히 작별인사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늘 그렇듯 갑자기 찾아와서 갑자기 가버렸다. 한번 뒤돌아본 천사는 다시는 내쪽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이래서 어른들이 네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거야. 너는 아무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를 않잖아.
내가 손에 쥐고 있던 붓과 팔레트, 스케치북을 가방에 서둘러 넣었다. 이 적막하고 우울한 숲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성급한 손길에 스케치북이 열렸다. 무언가가 팔랑 거린다. 납작하게 접혀 있지만, 아직 연보랏빛과 물기를 머금고 있는 은방울꽃 하나가, 아주 천천히 팔랑 팔랑 거리며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