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샀어

그림을 좀 알아? 아니.

by 박승연


나는 전공이 물리교육이다.

학교에서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과학을 가르치고,

성장기의 청소년을 '설득'하는 것이 일이다.


학교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지식과 기능이다.


지식은 돌멩이들끼리 뭐가 더 단단한지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느냐? 를 말하는 것이고


기능은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채

찾아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태도 등을 말하는 것이다.


굳이 교과와 연계시키지 않더라도,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청소년이 사회에 나가서

1인분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기능'적 측면을 더 강조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관심을 가진다면 지식이야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법에 능숙하지 못한다면, 다 된 일에도 문제가 생긴다.


사람을 대하는 법을 안다면 부족하더라도 기회가 생긴다. 모든 것이 충족된 완벽한 사람이 필요한 곳은 많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물 분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돌멩이를 깨뜨리면 어떤 모양이 나오는지

세포벽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돌멩이를 어떤 각으로 던져야 가장 멀리 가는지

를 가르치는 것보다.


개인 권리의 행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권리에 수반되는 책임에는 무엇이 있는지

절차를 무시해도 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는지

타인과의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

이성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 설득이 불가능할 경우에 타협하는 방법

이성적으로 의견을 전달하되, 감성을 살짝 섞는 방법

무조건 솔직한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때로는 솔직함이 문제를 떠넘기는 회피적인 수단이라는 것

를 알려주는 게 더 좋다.


이런... 써놓고 보니 윤리/사회잖아. 과목을 잘못 골랐다.

그래도 과학을 가르치면서도 해당 내용들을 다 학습시킬 수 있다. 담임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런데 내가 처음부터 이랬냐고?

아니, 옛날에는 생각이 전혀 달랐다.




예전에는 어떤 교사가 되고 싶냐고 물음이 들어올 때

'강의를 미친 듯이 잘하는 교사.'라고 했다.


지식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지,


"애들 잘 가르쳐서 대학만 잘 보내주면 장땡 아냐?"


이런 부끄러운 소리를 당당하게 입 밖에 내뱉곤 했다.


이 정도로 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런 성향을 내비치는 것이 약해빠진 것이라고 규정하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틀어막은 것 같기도 하고.


저런 20대 초반을 지나 중반을 거쳐

20대 후반의 마지막을 지나가고 있는 지금.


사람이 잘 변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꽤 잘 변하는 사람이란 것이 느껴진다.


변한다는 말. 긍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변화는 양과 음 어떤 방향을 특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면 말을 좀 바꿔볼까.


나는 우상향 하는 사람이란 것이 느껴진다.

겸손이 미덕일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아니다.


나는 고수를 만나면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고수가 무엇인가를 알려줄 때에는 쓸데없는 고집을 버린다.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의 시행착오가 압축된 정수를 그대로 받아낸다. 평소에는 미친 듯이 고집이 세지만, 그건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99%의 사람들에게 그런 것이고.


말 같잖은 소리를 하는데 내가 그걸 왜 귀 기울여 들어야 하지?


내가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서라도 나보다 잘난 구석이 단 한 가지라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배우고,

그들처럼 변해간다.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배운다.




감성과는 척을 지던 나.

기계론적 우주관에서 살아가던 내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밝힐 수 없는 게 맞다.)


지금은 꽤나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었다.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그림도 보러 다니고,

노출콘크리트로 마감을 한 큰 건물도 구경 다니고 말이다.


내심 '유화'그림을 한 점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최근에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림을 걸어둘 곳이 마땅치 않아 아직 수령은 하지 않았다.

전역하는 날. 작가님의 작업실에 가서 그림을 받아올 예정.


고3 담임선생님의 말이 생각난다. 2016년.


"일부러라도 너와 맞지 않은 것들을 접할 필요가 있어."


네, 선생님. 그렇게 하다가 보니 사람이 바뀌네요.

지금 제 나이가 그 말씀을 해주시던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어요. 10년이 흘렀습니다. 저도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학교는 좀 좁은 것 같은데,

때려치울 용기는 없네요.


학교는 그대로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 이것저것 많이 해보려고요.


저는 원해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밀도를 느끼고 싶어요.


2026. 1. 4.(일) 09:11 5 생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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