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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이면서 동시에 B이고 싶어요

공정성과 효과성 그들의 이율배반

by 박승연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각자의 바람이 존재한다. 넓은 집에 살고 싶다던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고 싶다던가. 그런데, 넓은 집에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사는 것이 양립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대신에 다른 것을 포기해야겠지만, 가능은 하다.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거나 힘든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벼우면서 튼튼한 물건, 건강에 좋지만 맛있는 음식,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 자상하고, 가정적이며, 능력이 뛰어나고, 인성이 훌륭한 배우자. 이런 것들이 있겠다.


공통점이 무엇인가?


좋은 것들을 '동시에' 고려하려다 보니 조건에 맞는 대상이 확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공정성과 효과성이라는 두 특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둘 다 사람들이 대개 좋아하는 특성이지만, 저 둘을 동시에 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 학교에서는 저 둘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바야흐로 대 '공정성'의 시대이다. 효과성이라는 가치는 아주 옛날부터 우리 인류와 함께하던 가치였는데 반해 '공정성'이 모든 인류에게 고루 뿌리내린 역사는 짧다.


우리나라에서 모든 국민이 공정함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은 길게는 갑오개혁부터 120년, 짧게는 문민통제부터 30년 정도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다.


개인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권력기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목소리를 내며.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는 시정을 요하는 절차를 아주 쉽게 밟을 수 있다.


학교라는 공공기관도 그렇다. 그런데, 학교라는 기관의 특수성이 마냥 공정성만을 강조하기엔 제한사항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민주적으로 학급 회의를 통해서 자리 배치를 한다고 해보자. 나는 교직 경험이 짧았을 때(물론 지금도 짧다.) 초반에는 자리를 내가 생각하는 대로 임의지정해 주다가 아이들의 의사결정을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교사가 개입하지 않을 테니 반장과 부반장의 주도로 학급 회의를 통해서 '공정'하게 자리를 정해보라고 했다.


결국 제비 뽑기 던, 사다리 타기던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랜덤으로 배치되는 자리로 귀결되는 모습을 봤다. 내가 원했던 건 각자의 신체적 조건이나 성향 등을 고려한 '효과적' 자리 배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뭐, 아이들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불만족이 없다면 이대로 자리를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아이들이 제출한 자리표 그대로 자리 배치를 진행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서 눈이 잘 안 보여요.

키가 작아서 앞 친구랑 가려요

A랑 B랑 떠들어서 수업에 방해가 됩니다

햇빛이 뜨거워서 땀이 많이 나요

바람이 들어와서 추워요

C 학생이 구석에 숨어서 잠만 자요

앞자리에, 뒷자리에 앉고 싶어요


말고도 뭐가 더 있을 텐데 아주 난리가 난다.


자기들이 좋다고 랜덤으로 돌렸는데, 나쁘지 않았던 학급 분위기가 순식간에 개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해당 상황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 학급 회의 시간에 안건을 던졌다. 앞으로 우리 학급의 자리 배치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가?


"어느 정도의 불만족이 있어도 감내할 것이니 선생님 마음대로 자리를 지정해 주세요."라고 하는 A 무리와.


"아 저는 랜덤으로 정한 자리가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B 무리로 갈렸다.


A와 B가 어떻게 다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아, 참고로 나는 강경 B무리 출신이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긴 했지만, 내가 정해준 자리가 더 학급 분위기의 긍정성에 미치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내 손으로 부여한 공정성을 내가 내 손으로 거두었다.




결과는 학급 분위기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산만한 학생들이 모여있지 않고, 엎드려 자던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깨어있고, 모둠 활동에 모두가 적극적으로(반 강제적인 모습도 연출된다.) 참여하는 분위기로.


공정성은 강하게 훼손되었지만, 효과성은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는 때로는 공정성보다는 효과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급 수준의 작은 집단에서는 교사가 카리스마적 지도성을 가지고 철인 흉내를 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는 학생으로부터의 신뢰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철인 흉내를 내면 철인이 아니라 산화철인이 되는건 시간 문제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라 필자는 독재를 옹호하지 않는다. 독재자들의 논리와 유사하지만, 그 목적성과 행위가 미치는 범위가 아주 작기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학교에서 생활하는 우리 아이들은 '공정성'에 아주 예민하다. 교사가 임의로 지정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면 아주 엇나가는 행태를 보이는 것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교사가 무조건 아이들의 모든 의견을 수렴해서 공정성과 효과성을 모두 만족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아이들은 아직 미성숙하기에 그들이 바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교사는 그런 것을 교정해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뒷짐 지고 멀찍이 떨어져서 "너희들이 알아서 결정하세요."라는 태도는 공정성을 방패 삼아 직무를 유기하는 것과 같다.




공정성과 효과성 사이 그 어딘가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너무 치우치게 된다면,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무엇이던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심하게 살펴보고 조정해주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중에서도 특히 학교는 '공정성'때문에 무너지고 있다. 조금의 불이익도 참으려고 하지 않는 개인들의 집합에서는 모두가 공정하지만,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개개인이 느끼는 효용의 합이 감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로 청소 자리를 정하는 것보다.

키가 큰 친구는 칠판을 닦고,

힘이 센 친구는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가지고 오며,

성격이 꼼꼼한 친구는 책상 줄을 맞추는, 그런 학급환경이 구축되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내가 자녀를 키운다고 생각해 보자.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손해 보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금 손해 보더라도 기꺼이 나설 수 있는 용기와 그 용기에 대해 인정하고 격려해 주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다. 이로 인해 혜택을 본 아이들이 다음 기회에 남들이 꺼리는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는 선순환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하고 싶다.


당신의 자녀는 어떤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는가?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지만, 집단 속의 개인으로 손해를 볼 수도, 이득을 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 여러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회복탄력성을 길러낸 사람.


조금의 불이익도 감수하려 하지 않는 사람. 무엇인가 정할 때 칼 같이 나누어 자신이 더 부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 갈등 자체를 회피하고 "공정하게 정한 건데, 민주적으로 정한 건데 뭐가 문제야"를 외치는 사람.


둘 중에 어떤 길로 갔으면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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