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과 비용은 로그의 관계에 있다.
X축을 비용(재화, 노력, 시간) Y축을 효용(맛, 퀄리티)으로 두면 둘은 로그 형태를 그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러닝을 시작하면서 위해 평소에 신고 있던 날렵한 자태의 스니커즈를 잠시 벗어두고, 낯선 유선형의 러닝화를 신고 달립니다.
초밥을 즐겨 먹던 P군은 유튜브를 보다가 '오마카세'라는 형태의 초밥집이 있다는 것을 듣고 3일간의 식비를 아껴 식당에 가봅니다. 전 연인에게 선물 받은 페**라이트*** 향수가 전남친 향수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듣고 꺼려지는 마음에 조** 향수를 하나 장만하기도 하죠.
네, 모두 제가 해봤던 경험입니다. 위의 세 경험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투입되는 비용을 늘려 경험하는 효용을 증가시켰습니다. 어떤 경험이건 간에 처음에 시작할 때는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투입되는 비용에 따라서 내가 경험하는 것들의 퀄리티가 증가하는 것이 피부에 바로 와닿기 때문이죠. 원래 사람은 즉각적인 보상에 빠르게 반응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 봅시다. 수학문제 1문제를 풀어서 얻는 만족감과 성취감은 훗날 쌓이고 보면 큰 성취이겠지만, 메**스토리의 몬스터를 잡을 때처럼 바로 전리품과 경험치를 보상으로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즉각적인 보상을 탐닉하고, 바라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생존에 유리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험을 누리기 시작할 때 즉, 초반의 '스타터 부스터'를 맞았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초반에는 돈이나 비용을 들이는 만큼 누리는 경험의 퀄리티가 가시적으로 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지금의 경향성이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2만 원짜리 판초밥을 먹다가 5만 원짜리 엔트리급 오마카세를 먹으면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처음 보는 생선들이 막 나오고,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하얀 옷을 멋지게 입고 내 접시에 음식을 한 피스 한 피스 놓으면서 "히라메입니다. 한 점은 소금에 한 점은 간장에 찍어드세요." 정체불명의 일본어와 내가 음식을 먹는 방식까지 지정해 줍니다.
사람마다 취향 차이는 있겠지만 저는 정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게 광어가 맞다고?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건 광어가 아니라 다른 생선이었나?
지불한 가격은 2.5배였지만, 개인적으로 느끼는 만족감은 2배 이상이라서 지출한 금액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보통 시작 단계에서 만족감을 느끼면 비용을 더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죠.
아니 5만 원짜리도 이렇게 맛있는데, 8만 원 10만 원짜리는 얼마나 맛있을까?
바로 저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처음으로 투입한 비용 대비 효용이 만족스러웠으므로 이 정도의 소비에서 그친다.
아니다, 비용을 더 투입해서라도 더 높은 수준의 자극을 추구해 보겠다.
둘 중에 어떤 선택을 하던, 완벽한 결과는 만날 수 없습니다. 전자의 경우 경험해보지 못한 더 높은 위계의 소비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궁금해하지 못한 채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후자의 경우 결국 2배 비용을 지출했을 때 만족도는 2배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죠.
저는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제 나름대로의 삶의 지혜를 깨달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화(돈, 시간, 노력)는 한정되어 있고, 내가 가진 재화를 어떤 식으로 투입을 해야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투입하는 것에 비해 산출되는 것들은 로그형태라면 한 곳에서만 모든 재화를 투입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라는 말이 여기에서도 적용이 됩니다.
그럼 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은 깨달았는데,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가 참 모호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셔츠 한 장에 10만 원이 비싼 것이 아닌 충분한 가격대비 효용을 지닌 것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과한 투자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알아서 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납니다. 그저 개인이 판단하기에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무엇인가에 잘 심취하지 않습니다. 지대넓얇을 장착해 모든 사람과 모든 주제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죠. 제 밥벌이를 책임져주는 '교사'라는 일만 제대로 잘 해낼 수 있다면 요즘 시대가 바라는 T자형 인재에 부합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나름대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찾은 멈추기 좋은 지점들입니다. 한 취미를 들입다 파는 분들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딱 제가 추구하는 수준이라 부끄럽지만 공개합니다.
러닝 : 10KM 50분
헬스 : 3대 450Kg
초밥 : 런치 5, 디너 10
술 : 레어브리드, 러셀 10, 조니워커 블랙, 아드벡 코리브레칸, 핫카이산 준마이다이긴조 유키무로 3년
필기구 : 펠리컨 m400, 이로시주쿠, 토모에리버
향수 : 바이레도 블랙샤프란
어떤가요? 저랑 관심사가 두 가지 이상 겹치는 분들이라면 여러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무슨 목표가 450이야 그래도 체급이 있는데 500은 찍어야지"와 같은 투입을 더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지점도 있을 것이고,
"미친 무슨 술 한 병에 10만 원이 넘어가 그냥 참이슬 먹으면 그게 몇 병이야"와 같은 너무 과한 투입이라고 생각하시면서 고개를 절레절레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것이죠. 저는 저 정도의 투입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많은 상황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위에 명시해 놓은 기준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알량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경험이 기대가 됨과 동시에 두렵습니다. 제가 재화가 무한정이었으면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깊은 경험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 쪽을 선호하는지라 지금보다 더 취미부자가 될 듯 합니다.
경험이라는 놈은 언제건 내 기준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종류의 경험을 깊게 파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재미가 보장되는 포인트까지 누리는 것을 선호합니다.
누군가는 찍먹충이라 욕할 수도 있지만, 원래 라면도 한 그릇 다 먹는 것보다 친구가 끓인 라면 한 젓가락이 제일 맛있다는 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진리이지 않습니까.
저는 제가 또 어떤 사람과 어떤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시되, 살짝만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그 살짝 보여준 세상의 문틈에 제 발을 끼워 넣어 제 세상을 넓히겠습니다.
얼만큼요? "딱 친구가 끓인 라면 한 젓가락만큼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