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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25. 3. 2.)

연속성이 없는 낙서들

by 박승연

이염


청바지를 입을 때, 이염에 주의하라는 말을 들었다.


목적성을 가지고 직물에 색을 입히는 것은 염색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를 이염이라고 하나보다.


이염은 피해야 하는 건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타인의 삶에 녹아드는 과정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삶의 색이 내 삶에 이염되어왔다.


이게 내가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자, 사람을 만나는 이유이다.

타인의 색이 나에게 베어드는 것,

내 색을 완성해 나가는 방식이다.

오늘도 나는 이염되고 있다.



그냥 까라면 까


저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 이미 들었는가. 활자로 굳이 명시하고 싶지는 않다.


권위 있는 자는 저런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가볍게 던지는 말도 듣는 이에게는 무겁게 다가온다.

하물며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말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권위 있는 자의 말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따르고 싶다.

그 권위를 가지기까지 그가 살아온 행적이 말의 무게를 더한다.


"그냥 까라면 까"

대개 저런 말을 내뱉는 류의 사람은

당연히 권위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말에 설득력이 없다.


설득력 있게 의견을 전달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할 때, 당신의 능력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필연적으로 설득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귀찮다는 생각에 "까라면 까"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권위 없고 권력 있는 자의 말을 따를지언정

당신이 바라는 알아서 잘하는 대상은 바랄 수 없게 된다.




취향


취향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든다.

뭐든 돈이 들지 않냐고? 그러네, 뭘 하든 간에 돈은 드는구나,

그럼 말을 조금 바꿔보겠다.

'남들과 다른 취향을 유지하는 데는 추가적인 비용이 든다.'


인터넷 세상을 탐험하다 보면, 아래와 같은 뉘앙스의 말들을 보게 된다.


"롤렉스가 카시오보다 더 저렴한 시계입니다. 롤렉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오르지만, 카시오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격이 떨어지게 되죠. 자본주의에서 어떤 대상의 가치를 매길 때는 구매 가격이 아니라 보유 시간에 따른 가격 변화까지 고려한 것을 가격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엔 무슨 헛소린가 했다.

아니, 롤렉스가 더 비싼 거 맞잖아. 그럼 지금 나 당장 현백 뛰어가서 데이데이트 사?

그런데 저 말을 곱씹어보고, 저 글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 물건의 가격은 상수가 아니라 변수이구나. 핵심은 물건의 가치가 상승한다는 것이 아니라

돈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물건의 가격이 상승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어떤 물건을 살 때는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가격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함을 깨달았다.


내 나이 27살. 중요한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자신의 취향을 유지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든다.

내 취향은 숲세권 아파트이다. 많은 이들의 취향은 숲세권과는 멀다.

둘 중에서 누가 더 저렴한 아파트인가? 다른 이들의 취향과 가까운 아파트가

환금성이 높고, 향후 가격 상승 여력이 높다.


내 취향은 한국에서는 잘 안 먹히는 웨건 스타일의 G70슈팅브레이크이다.

많은 이들의 취향은 흰, 검, 회색의 중형 SUV, 세단이다.

둘 중에서 누가 중고가가 높은가? 보통 사람들의 취향과 가까운 자동차가

중고가가 높게 형성되고, 판매를 원할 때 빠르게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예시를 들자면 끝이 없다. 아 자본주의의 세계란.

나는 그저 숲세권 아파트에서 자연을 보며 살다가,

빨간 G70슈팅브레이크를 타고 학교에 출근하고

가끔 한적한 곳에 차를 대놓고 야경을 감상하며 차박을 하는 것이었는데,


자본주의는 나에게 "네가 지금 니 취향을 내세울 깜냥이 되냐?"라고 핀잔을 준다.


그렇다고 사회의 모든 '보통'의 규범에 나를 끼워 맞추는 규격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건 또 아니더라. 돈과 관련된 것은 대세에 따르되,

내가 소비해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는 내 취향을 유지하며 살아가도 문제가 없다.


유한킴벌리 휴지를 쓰건, 쿠팡 휴지를 쓰건 자산 증식 속도에는 큰 차이가 없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밀고, 당기고, 달리고, 읽고, 쓰는 삶.


등 근육을 발달시키고 싶기에, 등운동 머신이 좋다는 헬스장에 등록하련다.

달리기 만큼 내 정신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없기에, 러닝화를 때맞춰 사련다.

책 읽기만큼 세상을 넓혀주는 일이 없기에, 도서관에 자주 가련다.

요리하는 순간만큼은 주방의 마에스트로가 나다. 백화점 가서 다양한 향신료를 사자.

가락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 오자. 소금과 식초에 절여 시메사바를 만들어먹자.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는 브런치를 켜서 끄적거리자.


내 취향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를 빗겨나갈 수 있다.


자, 이제 다시 말하면

남들과 다른 취향을 유지하는 데는 추가적인 비용이 들 수도 안 들 수도 있다.




20대의 사랑


나는 20대이다. 한국나이로 28살, 생일이 안 지났기에 만 나이로 26살.

모종의 사유로 휴전 국가의 휴전선에서 특정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임무가 끝나고 내 직장으로 돌아가게 되면 29살이 된다.


나의 20대의 사랑에게 안녕을 고할 나이라고 볼 수 있겠다.

29살이면 30이 코 앞이니까. 지금 미리 안녕을 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상대가 서운 편지를 보고 웃는 무례가

잠깐 보기 위해 왕복 5시간을 이동하는 낭만이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자존심을 세우는 고집이

정답을 알고 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는 심보가

헤어지자고 말할 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은 조급함이

질문에 대한 답이 늦어지자 마음속에서 생기는 다급함이

떨어져 있기 싫어 새벽까지 버티다 야간에 운전하는 위험이

고하는 이별을 부정하며 비 오는 날 바닥에 드러눕는 추태가

상대의 조건 따위 보지 않으며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울고 있는 상대방을 보며 왜 우냐고, 울면 뭐가 해결되냐는 핀잔이

싸움 뒤에 스트레스를 풀겠다며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는 행태가

내 행동에 대한 지적을 했을 때, 일단 아니라고 반박하는 방어기제가

친구야 나야라는 답정너에 "그건 비교할 수 없는 거야"라는 입바른 소리가


없다.


안녕, 나의 20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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