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핑은 맛이 안 삽니다. 옮기는 지금도 그렇고요.
토독토독 스마트폰 자판을 눌러 쓰인, 스크린에 띄어진 글씨들은 동일한 활자일지언정 종이에 눌러쓰는 글에 비하면 아쉽습니다. 종이에 적힌 글씨는 글을 쓰는 사람의 그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음이 재미있습니다. 중간에 쓰다가 틀리게 된 내용을 지울 수 없다는 것도, 고치면 흔적이 남는다는 것도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종이에 적힌 글을 타이핑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들은 수정을 합니다. 수정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변하지는 않지만, 글의 감칠맛이 상할까 걱정이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종이 원본을 스캔해서 어딘가에 박제하고 싶습니다. 통제된 환경이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 나이지만, 이런 순간에는 못내 아쉽습니다.
과거의 순간들을 기억해 보면, 얇은 일제 볼펜을 열렬히 좋아했습니다. 다양한 색이 눈에 밟혔고, 내 필통을 무지갯빛으로 가득 채워냈습니다. 얇은 획이 마치 기술력인 양 으스대는 일제 볼펜들을 사용하며, 볼펜똥이 묻어 나오는 굵은 획의 국산 볼펜들을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볼펜 똥을 닦으면서 사용해야 하는 국산의 검정 볼펜만을 사용합니다. 필요할 때 한 움큼 사놓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도 내 손에 잡히면 제 기능을 다 하는 이 녀석이 이제는 좋습니다.
굵은 획이 가지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내용을 작성하더라도 더 강하고 심지가 굳센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리듬감 있는 글씨 쓰기를 즐기는 나에게 얇은 펜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종이를 긁어대며 살려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내 변덕을 묵묵히 받아내며 자신의 노고를 티 내는 양 똥을 이따금씩 뱉어냅니다.
볼펜 똥으로 번진 글씨가 내가 이 지점에서 펜을 고쳐 잡았구나 가늠하게 합니다. 나의 무의식 중의 행동이 종이 위에 적혀 있는 글씨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통화 녹음 기능이 보편화되면서 자신이 타인과 통화하는 소리를 타인의 입장에서 들을 일이 종종 생깁니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보통은 어색함을 느낍니다. 남이 찍어준 사진이 견디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또한 견뎌내어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에 쓰인 글은 수정이 안 됩니다. 내 사고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기에 작성이 종료된 글을 읽어보면 어색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전문 작가가 아닌 이상 당연한 결과이겠죠.
나는 이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분명하게 인식하여 매일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강요된 주제의 형식적인 글쓰기를 반복하던 수험 시절 단련된 내 오른손의 소근육은 이제 한 시간 정도는 종이에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길러주었습니다.
강요된 고통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지금 자유로운 글쓰기를 누릴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었습니다. 지금 내키지 않는 일이 언제 나의 양분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앞으로의 삶에 기대감을 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