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뼉이 마주칠 확률
코흘리개 시절, 사랑이 밥 먹여주는 줄 알았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외쳤다. 아, 물론 지금도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알려주시면 무한한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저 코흘리개는 호르몬의 노예.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담보되지도 않은 상황에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연인을 잠깐 만나는 '서프라이즈'를 하겠다며, 왕복 7시간 거리를 나서는 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지하철 한 시간, 기차 한 시간 반, 다시 버스 한 시간.
무엇이 그를 그리 내달리게 했는가. 이제 와서 돌이켜봐도 전혀 가늠이 되질 않는다. 놀라는 일이 부쩍 줄어든 요즘, 과거의 내 행적을 생각하며 놀라곤 한다.
나는 잘 울지 않는다. 사람들이 있는 공공장소에서는 더욱. 내가 나임을 자각한, 자아가 있는 인간임을 인지한 이후 딱 한번 공공장소에서 울어본 적이 있다. 남자는 울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등 떠미는 사회에서 그렇게 비슷하게 자라온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지난 여름날 연인과 약속이 있어 함께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출발 장소에서 만나 반가운 것은 나뿐이었나 보다. 왜인지 상대의 반응이 냉랭하다.
나는 덜컥 내가 미워졌나 고민하며 슬쩍 손을 잡아본다.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머릿속에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코 끝이 찡해져 입술을 깨물어 티를 안 내려 노력을 했다.
버스를 타고난 다음에 나는 창가자리에 앉았고 창 밖을 쳐다보며 이전의 일을 계속 생각하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일치하지 못할 수도 있음이 두려웠고, 혹시 모르게 가까이 다가왔을지도 모르는 실연이 두려워 눈물이 났다.
웃기에도 자초지종을 들은 상대는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었지만, 마음이 풀렸단다. 이유는 당시에도 몰랐고, 여전히 지금도 모르겠다. 물어보면 문제가 생길까 궁금함을 참았던 한 사람이 나는 생각난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
배움에는 늦음이 없다.
위 두 문장은 상충된다. '모든'것에는 '배움'이 포함되기 때문에 저 두 문장을 동시에 긍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배움에는 늦음이 없지만, 경험에는 때가 있다.
책임지지 못하는 나이의 객기 어린 행동은 이해받고, 때로는 권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임지는 나이의 그러함은 추태라 한다.
추태 부리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추태의 백신인 청년의 열병을 적절한 시기에 앓아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희화화하곤 한다. 연애프로그램에서 회자되는 이들에서 많이 보이는 유형이다. 그들의 행동을 10대 20대 초반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라. 얼마나 풋풋하고 싱그러운지 모른다. 부정하고 싶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나이가 듦에 따라 요구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청년의 열병을 충분히 앓았는지도 알게 모르게 평가한다. 그러니, 청년들이여 뜨겁게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