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체

우리는 국소적으로 우주를 거스르는 존재

by 박승연

평소보다 일찍 문 밖을 나서는 내 발걸음이 가벼운 까닭은 무엇일까. 명분이 있는 자의 걸음걸이는 언덕조차 평지처럼 느껴지게 했다. 마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자전거 페달을 팽팽 밟아대며 언덕을 지나 큰 교차로에 잠시 멈춰 서니 어스름이 하늘에 펼쳐져있다. 멈춰 서고 나니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내달리는 순간에는 듣지 못했다.


정신이 맑으니, 아니 맑아야만 하니 몸은 지치지가 않는다. 아니, 지치는 줄 모른다고 해야 할까? 이게 맞다. 일정이 끝나면 지쳐 쓰러져버리니까. 하지만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내 모습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고 생기만이 가득하다. 명분이 있는 자는 지친 기색을 내비칠 생각이 없다.


이러다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수 없이 외쳤던 옛날의 나를 패대기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지는 몰랐지. 어쩌지? 지금이라도 블로그를 갈아엎어야 하나? 아니, 어쩌겠어 사람이 생각이 변할 수도 있는 건데, 지난 과거의 모습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감정은 향신료와 같아서, 없어도 죽지는 않겠지만 없으면 재미가 없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우리 모두 어떤 시점에서인가 타 보지 않았는가?


손짓 하나에 전율이 흐르고, 눈빛 하나에 설레어 잠 못 이루는 그런 밤 말이다. 괜히 한마디 더 걸어보고 싶어서 머리를 싸매고, 짧은 한 마디에 담긴 의미를 헤아리려 고통스러워하는 그 짧은 시간 말이다. 예전에 그랬으니 지금은 안 그럴 것이라며 잔뜩 어른스러운 척 굴지만, 막상 또 그 순간이 오면 예전에 그랬던 것 마냥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겠지. 말 한마디라도 더 이어 가 보려고.


손익을 따질 수가 없다. 무슨 손해라도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잔뜩 이성적인 척해놓은 내 과거를 불살라버리고 싶다. 내가 한 말을 넉가래로 싹싹 긁어모아 다 주워 담아 내 입안에 쑤셔 넣고 싶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내가 한 말이 결국 나를 구성한다. 덕지덕지 붙은 꼬리표를 애써 손으로 가려보려고 하지만, 손으로 가리지 못하는 것은 비단 하늘뿐만이 아니다. 꼬리표는 결국 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와 내 마음이 무색하게 잔뜩 존재감을 돋보인다. 포기하자.


"연기하지 마라 솔직해져라." 잔뜩 이런 조언을 하고 다닐 때는 온 데 간 데 없고, 있는 힘껏 가식을 떨어댄다. 아니? 가식이 아니야 나는 변화한 거지. 생각도 변할 수 있는 거고 행동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사람은 살아있잖아. 유기체라고, 우주의 법칙을 국소적으로 거스르는 기적이 난데, 이보다 더한 것도 아닌 덜한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내일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에 이르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사람 바꿔 쓰는 것 아니라며 철 지난 냉소를 둘렀다만, 남을 바꾸지 말라고 했지, 나를 바꾸지 말라고는 안 했다며 애써 이유를 붙여본다. 역시, 꿈 보다 해몽이다.


2025.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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